법과 양심
김종우 | 입력 : 2013/11/23 [00:30]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법도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잣대가 없는 사람을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법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양심은 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은 아무 때나 뜯어고칠 수 있지만 양심은 고칠 수 없습니다. 양심은 법위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를 말합니다. 사람의 정신적 활동이 법률로 금지되거나 강제되지 않는 자유권의 하나로 여러 나라의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사전적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때로는 양심에 호소하고 양심에 묻기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신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신 앞에 떳떳하게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에 따라 믿음의 신은 다를지 모르지만 양심의 기본은 같습니다. 그래서 양심은 자기위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그르치면 죽기 때문에 인체에서 삶의 상징인 심장과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걸고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뉘우치기도 합니다. 생각할수록 지키기 어렵고 두려운 것이 양심이기도 합니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 될 때마다 양심을 속이고 끝까지 버티다 물러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추천한 사람들은 새로 인선된 분들을 끝까지 옹호하려고 발버둥 치다 결국 여론에 밀려 당기기만 하던 끈을 놔 버립니다. 양심을 속인 분들을 이시대의 능력가라고 추천한 사람들의 안목이 두렵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양심을 속이고 잘못과 타협하며 구구한 변명으로 일관하다 떳떳치 못했던 치부들이 언론에 의해 속속 들어나자 떠밀려 물러나는 그들의 추한 뒷모습이 두렵습니다. 그때마다 서둘러 봉합은 했지만 추천받는 분이나 추천하는 분들이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천한 사람이나 추천 받은 사람이나 모두 겸허한 마음으로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될 터인데 그렇지 않은 것은 교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할 때 머리 숙이는 것보다 넉넉하고 풍족할 때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될 터인데 말입니다. 권력 최고위직에 있는 그들을 위한 걱정보다 그들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민초들이 걱정입니다. 양심을 자기 위주로 해석 할 수 없는 최근의 경우였습니다. 비커에 찬물을 담고 그 안에 살아있는 개구리를 넣은 다음 서서히 열을 가하면 그 개구리는 점점 덥혀져가는 환경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헤엄치다가 결국 데어죽습니다. 사지가 뻣뻣해질 때 까지 목숨이 끊어질 때 까지 환경 변화를 모른다고 합니다. 사람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죄의 물속에서 헤엄치다 보면 나중에 큰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전혀 못 느끼게 됩니다. 죄의식을 느끼고 죄책감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이 양심의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못 느낀다면 양심을 잃은 것입니다. 서서히 변해 가고 있는 환경변화가 점점 덥혀지고 있는 비커속인지 이 시점에서 더 늦기 전에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익숙하다보면 변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변하긴 해도 환경이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비커속의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무력감등 두려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고 태연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날을 세우면 늘 의심이 이긴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양심과 믿음만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 펼쳐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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