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의 한국정치사(1)】36년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경술년 국치로부터 36년간 일본 식민지...압제에서 벗어난 광복.-미국.영국.중국등의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의로 대일 항복권유-끝내 거부하다가 원자폭탄 2발에 무릎끓은 일본국왕 ,조건없는 항복
일제의 사슬에 풀려나기까지 나라와 겨레의 명운은 풍전등화였다. 경술국치로 시자된 일본의 주권 찬탈과 온갖 압박의 역사였다. 항일독립운동이 1919년 3.1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상해를 비롯 미국,유럽등지에서 활발히 펼쳐졌고, 임시정부도 수립됐다. 하지만 폭력과 무도한 36년간의 만행앞에 민족의 시련은 상처와 고통이됐다. 하지만 조국을 찾기위한 항일독립운동의 선각자들,그리고 애국 선열들의 애국.애민의 헌신과 희생으로 민족혼을 불살랐던 시대였다. ◇카이로,포츠담선언에서 열강의 對日경고...조선독립으로 점화. 1945년5월7일. 연합국의 총공세에 나치독일이 깃발을 내렸다. 이튿날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맞서 항전의 뜻을 표하자 미국은 5월15일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여기에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이 대패하면서 일제의 아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달 뒤인 7월17일 패전국인 독일 포츠담에서 미·영·소 대표들이 모였다. 역사책에 나오는 ‘포츠담 회담’이다. 3국 정상들은 파시스트 소탕전으로 끝장내고, 이어 아시아의 침략국인 일본을 무찌르기로 결의한다. 이는 앞서 지난 1943년 12월1일 이집트카이로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개석 총통 등 세 거두가 모여 ‘카이로협정’으로 결의한 연장선상이다. ‘카이로 회담’의 주된 합의는 ‘대일군사행동’에는 전후처리문제를 비롯 한국문제해결 보장을 명확하게 담고 있다. 3국 대표는 육·해·공군을 동원해 야만적인 일제를 총공세를 통해, 그간 일본의 폭력과 탐욕에 약탈된 일체의 지역으로부터의 일본인 축출과 조선민족에게 적당한 시기에 자주독립의 기회를 보장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2차 대전이후 국제사회의 최초의 독립보장이다. 그뒤 1945년 7월17일 제 2차 포츠담회의가 열렸다.여기에는 미국·영국·소련 열강의 수뇌부가 다시 모여 독일을 비롯 연합국의 전후처리문제를 협의했다. 이어 일주일 뒤 제 3차 포츠담회의를 또 열었다. 여기에는 미국·영국과 소련대신 중국이 참석했다. 이들 3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하는 내용을 결의안을 제8항에 명시했다. 이와함께 카이로 선언의 이행도 거듭 확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주권은 본토(本土)와 북해도(北海島),구주(九州)와 몇몇 소도(小島)에 국한한다고 명문화했다. 이는 카이로선언에서 한반도등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일본 국왕이자 전범인 히로히토(裕仁)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일본 본토에 미군의 원자폭탄세례.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이어 9일에는 나카사키(長騎)가 연이어 원자폭탄의 공격을 받았다. 인류역사상 미군이 최초로 사용한 핵폭탄이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소련도 8월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 도쿄(東京)에서는 일본 왕을 비롯 전쟁책임자들이 요즘 말로 ‘멘붕’에 빠졌다. 8월9일 밤, 한밤중에 일본 왕궁 방공호에 일본국왕을 비롯 일본 전쟁수뇌부들은 모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1945년 8월 14일 오전 10시 50분 이른바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어전회의가 열리기까지 군부 내에서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이 적지 않았다고 당시 일본 신문들은 훗날 전했다. 하지만 일본이 사는 길을 무조건 항복이라는 국왕과 대신들의 주장을 꺾지 못했다.
◇경성의 조선 총독부와 조선거주 일본인들의 패퇴. 이 정세를 눈치 챈 조선총독부와 이땅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더니, 패전이 짙어지자 살길을 찾기위해 분주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마지막 형세를 면밀히 관찰하던 조선총독부 일당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고 한다. 당시 총독은 아베 노브유키(阿部信行)였다. 노브유키는 국내지도자격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자신들의 신변보호등을 청했으나 모두 거부됐다. 고하와 몽양이 그에게 어떤 얘기를 전했는 지는 대략 전해진다. 다만 총독이란 작자가 사태해결에 협조를 구했으나 단호하게 거부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독의 고위직에 있던 작자들도 주위의 사람들과 한강상류 팔당에서 접촉하면서 향후 문제를 논의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은 서울 충무로에 있던 어느 일본인의 집에 매일 모여 향후 조선총독부의 폐지를 상의했다. 당시 기록에는 총독부 보안과장 이소사키(磯騎), 차석 가무관 하라다(原田), 조선군 참모 가미사게 등이 모였다. 8월13일 쯤 이들이 박모씨, 고하 송진우를 찾아왔다는 얘기도 기록에 있다. 그들은 악화일로 있는 일본의 전세를 솔직히 말하려 들지 않고 ‘다만 형세가 매우 급박, 중대하게 되어가니, 행정위원회같은 것을 조직하시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들은 방향을 틀어 ‘독립준비를 해도 좋소’라고 마치 허가하듯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이들의 사탕발림에 넘어 가지 않았다. 고하는 오히려 ‘우리(조선)는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말 것“이라고 말하고 박차고 나왔다. 다음날 하라다가 찾아와 권유하고, 경기도 보안과장 다나까( 田中)가 찾아와 권하더니 마지막에는 경기도지사 이끼다(生田)가 경찰부장 오다(岡)와 함께 와서 권했지만 고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다라는 자는 고하의 반일감정이 뼈에 사무친 것을 보고 안절부절하다가, 끝내 비상사태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고하에게 이들이 이처럼 매달린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힘을 빌려 줄테니 이를 맡아 자기네들을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고하.낭산 모두 총독의 신변보장요구 거부. 총독부 고관들은 심지어 총독부의 권한 4분의 3을 줄테니 응해달라고 했다. 뿐 만 아니다. 신문,방송, 교통기관,헌병,경찰,검사국까지 주겠다며 일본인의 거류를 보호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신변보호문제와 사유재산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들은 고하에게 이 자리에서 결정하고 총독 경무총감인 엔도(遠藤)에게 가서 사실을 알리자고 협박했다. 고하 송진우는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고하 송진우를 포기하고 이번에는 낭산(郎山) 김준연(金俊淵)을 찾아갔다. 이날이 8월14일이다. 낭산은 마지 못해 경기도 지사를 만났다. 이들은 낭산에게도 4, 5시간을 설득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미군 폭격기 B29가 서울 상공을 날았다. 그바람에 시민들이 방공호로 피난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일본인들은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국내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까 조바심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끼다 지사는 낭산에게 물었다. ‘송진우를 만났나?(이끼다)’,‘ 그렇다(낭산)’,‘그러면 낭산 당신도 송진우와 의견이 같은 가(이끼다)’,‘ 그렇다(낭산)’ 이처럼 총독고관들이 모두 나서 송진우, 김준연등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신변보장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권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운명의 시간, 일본 국왕의 조건없는 항복선언. 8월 14일 저녁 당시 라디오 방송은 8월15일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가 나왔다. 전국에 수백대정도의 라디오 시대 였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라디오에서 일본국왕의 항복방송이 나왔다. 당시 항복선언문은 이렇다. ‘우리의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臣民)들이어. 세계의 일반적인 정세가 오늘 우리 제국에서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여러 관계를 깊이 생각한 끝에 우리는 비상조치로 피난처를 구하고 일제히 정세를 조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정부에 명하여 아메리카 합중국, 영국,중국, 및 소비에트연방에 정부에게 우리의 제국이 이들 여러나라, 정부의 공동성명의 조건을 수락할 것을 통고시킨바 있다. 우리가 우리 천황가의 선조부터 이어받아 우리가 깊이 명기하고 있는 장중한 의무는 만국의 국민의 복지 및 우리 신민의 안전과 행복에 힘쓸 일이다. 사실 우리가 아메리카나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한 것도, 일본이 자존을 보증하고 동부아시아를 안전시키려는 건전한 희망에서요, 다른 여러 나라의 주권을 손상시키거나 영토의 확장을 도모하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도 어느덧 4년 가까이 오도다. 모두들 그 최선을 다하였으나 그리고 육해군이 용감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리들이 직무에 정려(精勵)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천만 국민의 헌신적 봉공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발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일방 일반적인 세계정세도 일본에게 유리하게 되지 못했다. 게다가 적은 실로 측량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무고한 목숨의 희생을 요구하는 세상에 없는 무서운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만일 전투를 계속한다면 그 결과는 최종적인 와해와 일본국민의 파멸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는 인간문명의 완전한 파괴를 가져오리라. 이같은 사정이 아래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기천만의 신민을 구원하고 혹은 우리 천황가의 선조의 신령에 응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가 열강의 공동선언의 조건을 수락할 것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제군과 함께 동부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동부아시아의 맹방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싸움터에서 쓰러지고, 직장에서 순직하고, 비명으로 쓰러진 전사나 그 유가족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밤낮없이 쑤셔온다. 전상을 입고, 전재를 만나고, 가업을 잃은 사람들의 후생에 관하여서는 우리의 진심으로의 걱정의 대상이다. 우리국민이 금후 받아야할 고난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로다. 우리는 우리 신민의 마음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운이 명하는데 따라 우리는 뒤를 계속해 따라올 만세를 위하여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 평화의 큰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다. 여기 제국의 구성을 호지(護持)하는 것을 얻은 뒤에는 우리는 항상 우리의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과 함께 있고 신민의 적성(赤誠)에 의거하고 있노라. 무익한 분의(紛議)를 일으키지 않지 못하는 일체의 감정의 격발, 사람을 정도로부터 유혹하여 세계의 신뢰를 잃게하는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 감정의 격발을 절대로 삼가야 할 일이다. 각자의 총력을 집결시켜 그것을 장래의 건설에 기울이도록 하자. 정의의 길을 열고 정신의 소중함을 배양하여 단연 제국전승의 명성을 높이고 세계의 진군과 보조를 맞추도록 해야할 것이다‘ ◇36년 사슬에 풀려난 ‘조선독립만세’ 이로써 우리는 사슬에서 풀려났다.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설음과 눈물로 세월을 산 조선인들은 쇠사슬을 끊고 감격에 싸였다. 해방의 기쁨과 ‘대한독립만세’가 메아리쳤다. 3천만 민족이 몸부림치며 환호한 8.15. 하지만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역사는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줬다. 일본 국왕의 항복방송으로 최후의 막을 내린 조선총독부. 그로부터 미군이 상륙하던 날까지 우렁찬 독립만세와 감격어린 울분을 뒤덮인 3천만 겨레속에 전전긍긍 나날을 보냈다. 맥빠진 일본인들은 사형을 집행받기전의 중죄인의 몰골들이었다. 8월21일, 서울에는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금명간 하지 중장이 방문할 것이라는 비라가 뿌려졌다.그후 미군이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그해 9월 9일이다. 이날 오후 4시, 일제 식민지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3천만 동포가 해방되었음을 실증하는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있었다. 하지중장을 대표로하는 미국측과 아베 노브유키 조선총독, 상월(上月)조선군사령관 ,산구(山口)진해경비부 사령관등 일본측이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역사에 기록된 이 항복조인식은 30분 만에 끝났다. 일본의 깃발은 곳곳에서 자취도 없이 떼어지고, 찢기고, 불태워졌다. 온 국민은 그때마다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후 9월12일 아베 노브유키는 파면되고, 나머지 경관들은 16일에 물러났다. 일본인의 ‘게타’짝 발자국은 조선 강토에서 사라졌다. ▶참고문현;한국야당사(이기택지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충청남도지(충남도지편찬위) 한밭승람(변평섭지음) 사건반세기(신수용지음)등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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