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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충청얘기(2)]소파 방정환의  어린이날제정,  장인인 손병희에 '큰 영향'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는 소파 방정환.-방정환, 장인인 손병희 선생의  항일운동 답습..-손병희, 민족혼 깨우고 독립정신고취위해 교육사업전념.-방정환, 장인 손병희의 3,1 독립만세운동등에 큰 영향.-일제때 어린이날 폐지등 억압. 해방되고서 어린이 존중사회 확산.

신수용 대기자 | 기사입력 2020/05/04 [22:55]

【단독】[충청얘기(2)]소파 방정환의  어린이날제정,  장인인 손병희에 '큰 영향'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는 소파 방정환.-방정환, 장인인 손병희 선생의  항일운동 답습..-손병희, 민족혼 깨우고 독립정신고취위해 교육사업전념.-방정환, 장인 손병희의 3,1 독립만세운동등에 큰 영향.-일제때 어린이날 폐지등 억압. 해방되고서 어린이 존중사회 확산.

신수용 대기자 | 입력 : 2020/05/04 [22:55]

[세종경제= 신수용 대기자]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는 소파 방정환.

그는  5월5일 어린이 날 제정은 우리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미래세대를 육성해야한다고 부르짖었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사진=국립미술박물관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사진=국립미술박물관 제공]

때문에 어린이 날은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는  취지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방정환이 중심이었다.

 방정환이 어린이를 귀하게 키워야한다는 주의 주장과 배경 뒤에는  손병희 선생(이하 손병희)의 영향이 지대했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손병희는 충북청원출신으로 1919년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자, 천도교 3대 교주다. 

 그런 손병희는 방정환의 장인이고, 방정환은 사위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도 방정환이다.

 일본을 이기기위해 민족혼을 깨워야하고, 그러려면 어린이를 존중하고 육성하는 일이 먼저라고 그는 외쳤다.

​왜색짙은 노래와 어느새 범람해 자리를 트는 일본말을 차단하기위해 우리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부르짖은 이가  방정환이다. 

​그래서 내놓은 대표적인 말이 어린이라는 우리 말이다. 

 그는 나이 어린 유소년을 '어린 이'로, 그리고 청.중년을 '젊은 이'로, 장년과 노인을 '늙은 이'로 나눠 써야한다고 계몽했다.

지금은 '늙은 이'가 마치 노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으로 시비가 붙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우리말을 고집한 방정환은 '어린이'의 상대말로 '늙은 이'로 썼다. ​

이처럼 방정환등 색동회회원들은  어린이를 큰 가치로 여겼고, 기리는  날을 만든 것이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노래.[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노래.[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어린이의 순수함과 꿈, 그리고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야  일본 압제와 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깊은 뜻도 간직하고 있다.

 ◇ 방정환, 장인인 손병희 선생의  항일운동 답습.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일본 도요 대학 미술과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방정환의 장인인 손병희의 이름은 손응구(孫應九), 그 뒤 손규동(孫奎東)으로 고쳤고,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손병희는 22살 때인 1882년(고종 19)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다.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 이른바 일본을 처내자는 것이다.

손병희등은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남접(南接) 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였다.

손병희는 두령으로서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이후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충남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한 뒤 충남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를 벌였으나 일본을 등에 업은 관군에 패배했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노래.[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방정환의 장인인 의암 손병희 선생.[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관군의 추격으로 수십차례의 위기를 맞았으나, 동학간부들의 노력 생존했다.

하지만 1897년 12월 24일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 바꾼뒤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물려주고 은퇴했다.,

손병희는 긴시간 동안 일본, 중국등을 국내외를 떠돌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동학에 대한 관군의 탄압에다 천도교내의 주요인사들의 배교(背敎)와 암투, 친일 매국행위자들이 들끓자 이들과 손을 끊고  오직 항일 독립에 전념했다.

손병희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알고, 모든 것을 교육에 집중했다. 

◇손병희, 민족혼 깨우고 독립정신고취위해 교육사업전념.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에 보조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했다. 

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도 관계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도왔으나 경영난에 봉착하자 이를 인수한데 이어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했다.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 8개교에 관계하였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1919년 일본 동경(東京)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권동진·오세창· 최린(崔麟)과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의암손병희 동상.[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의암손병희 동상.[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손병희는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2년 별세했다.​

소파 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날 당시 신문광고[사진=소파 방정환 재단 제공]
소파 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날 당시 신문광고[사진=소파 방정환 재단 제공]

손병희에게는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방정환, 장인 손병희의 3,1 독립만세운동등에 큰 영향.

방정환은  장인의 3.1만세운동을 익히 목격하고,답습해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달렸다고 판단했다.

방정환은 이에 따라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의 고유 문화와 예술 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기를 목적으로 1922년 3월 16일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했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관련 신문보도내용[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관련 신문보도내용[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장인이 3.1 만세운동으로 검거됐다 풀려난 1922년 별세한 다음해다. 

이것이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언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미 3·1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 소년들의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1921년에 결성된 손병희의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운동을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다른 견해는 1922년에는 이와 함께 불교소년회와 조선소년군이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고 기념행사를 열기 시작했다는 의견도 있다. 

흥미로운 기록은 1923년 5월 1일 첫 번째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란 선언문이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포스터내용[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어린이날 포스터내용[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선언문중에는  “어린이에게 경어(敬語)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을 부탁한 것이다.  

또한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용하고”,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연소노동을 금지하며”,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과 같은 아동기본권도 나와있다.

​소파 방정환[ 사진=소파방정환 재단제공]​
​소파 방정환[ 사진=소파방정환 재단제공]​

그 때 어린이날의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였다.

◇일제때 어린이날 폐지등 억압. 해방되고서 어린이 존중사회 확산.

방정환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 부인, 내가 왜 호가 '소파(小波)'인지 아시오? 작은 파도, 잔물결이란 뜻이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 

그러나 1927년에는 5월 1일이 노동절과 겹쳐 어린이날을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이후 방정환과 색동회의 어린이 존중사회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됐다

일제는 어린이날 행사와 어린이(소년)운동은 무산아동의 해방론과 같은 계급적 항일적 성격의 운동이라며 행사자체를 금지했다.

더구나 단체내 불화가 생겨  1920년대 말에는 어린이운동이 약화됐다.

그러더니 1931년부터는 일본 조선총독부가 ‘유아애호주간(幼兒愛好週間)’으로 어린이날 행사의 주도권을빼앗아 가면서 어린이의 존중이 아닌 육체적 건강이라며 노역을 합법화했다.

방정환의 어린이 날 행사는 끈길 위기에 놓였으나 해방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1945년 해방후에는 5월 5일로  어린이 날로 정하여 행사를 했다.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어린이날 행사[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어린이날 행사[사진=소파방정환 재단 제공]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선포되었으며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명시했다.

이어  1970년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된 이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어린이헌장은 1988년 민주시민으로서의 지향을 담은 내용으로 개정되었다.

지난  2018년부터는 어린이날이 주말이나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 그 다음 비공휴일을 대체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해마다 대전을 비롯 세종. 충남. 충북등 전국 각 시·도는 물론 기초지자체와 유관 기관들도 어린이가 참석하는 기념식등 다채로운 행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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