넵스키 수도원 묘지의 으뜸 인물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잠들어 있다. 이 수도원에는 두 개의 묘지가 있는데 하나는 예술인 묘지고 하나는 18세기 묘지다. 수도원 정문 앞의 큰 길 로터리 중앙에는 긴 창을 들고 말을 탄 모습의 넵스키 대공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수도원의 커다란 아치형 정문으로 들어서면 맞은편의 붉은 색 수도원으로 통하는 골목 같은 길이 나오는데 그 길 오른쪽에 예술인 묘지가 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 18세기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 숲 속 같은 느낌을 준다. 예술인 묘지에는 이름 그대로 유명 예술인들이 많이 묻혀있다. 문학인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차이코프스키, 글린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음악인의 묘가 눈에 더 많이 띈다. 그런데 그 유명 예술인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중요한 인물을 도스토옙스키로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묘지 입구에서 나눠주는 수도원이 제작한 묘지 지도에 1번이 도스토옙스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 묘소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가장 많다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나는 예술인 묘지를 두어 차례 방문했는데, 도스토옙스키 묘를 찾은 러시아인 단체 참배객들을 목격한 적이 있다. 묘지 지도에는 모두 14명의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중 주요 인물을 보면, 1번 도스토옙스키(1821~1881)를 필두로 2번은 유명한 시인이며 동화 작가 주콥스키(1783~1852), 3번은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감상주의 유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카람진(1766~1826), 4번은 유명한 작곡가 글린카(1804~1857), 5번은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 6번은 작곡가 무소륵스키(1839~1881) 7번은 화학자이자 작곡가였던 보로딘(1833~1887), 그리고 8번이 차이코프스키(1840~1893)다. 넵스키 수도원의 예술인 묘지는 도스토옙스키의 묘로 유명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 작곡가들이 가장 많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묘비는 도스토옙스키의 흉상을 앞에 잘 드러나게 만든 아래쪽이 넓은 사다리 모양으로 기품이 있고 크기도 제법 크다. 최초의 묘비는 단순한 모양의 석비였으나 그 후 현재와 같은 흉상이 들어간 묘비로 바뀌었다. 묘비 앞에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제사(題辭*epigraph, 소설의 핵심 글)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푸시킨 부인의 묘 한편, 예술인 묘지 맞은 편의 18세기 묘지에는 18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과학자 로모노소프(1711~1765)와 스위스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연구 활동을 한 셰계적인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오일러(1707~1783), 그리고 폰비진(1745~1792) 같은 작가와 당대의 저명한 건축가, 조각가 등의 묘가 들어 있다. 묘지 지도에는 이중 저명한 9명의 이름을 올려 놓았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이 6번으로 소개된 란스카야(N. Lanskaya, 1812~1863)다. 이름 옆에는 푸시킨 부인이라고 설명을 써놓았다. 푸시킨 부인의 본명은 나탈리야 곤차로바다. 그녀의 묘비명이 란스카야인 것은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죽은 후 재혼한 남편의 이름이 란스코이이기 때문이다. 나탈리야는 푸시킨이 죽은 지 7년 후인 1844년 나이 많은 란스코이 장군과 재혼했다. 란스코이 장군은 나탈리야와 결혼 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황제가 주선한 재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탈리야는 1863년 51세로 사망했다. 나탈리야는 비록 재혼을 했지만, 푸시킨 부인이었던 것만으로도 유명인사로 대접하는 것이 러시아의 당대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Tag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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