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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6)

태종도 평범한 시아버지였다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2/05 [10:22]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6)

태종도 평범한 시아버지였다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2/05 [10:22]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의 세종대왕 동상

태종, 일생동안 불행하게 살았다.

태종의 일생은 권력의 비정함에 바탕을 둔 투쟁의 연속이었다. 권력의 비정함 속에서 왕실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냉혹한 주변 관리와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힘뿐이었다. 고려 말 어설픈 믿음으로 믿고 일을 맡기려던 관리들은 부메랑이 되어 조선 왕실과 자신을 노렸고, 고려의 힘없는 왕은 허수아비보다도 더 무력함을 보았다. 태종은 쉰여섯 해를 살면서 문치(文治)를 융성케 하고, 무위(武威)를 거두려면, 어느 것 가릴 것 없이 최고 정상에는 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후세 왕들이 정상에서 원활하게 통치하도록 판을 마련하느라 사사로운 감정은 어떤 것도 무 자르듯 잘랐다.

조선 개국 과정을 돌아보면 태종보다 조선이 어떻게 건국 되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실록은 태종이 임신년 가을 7월에 비밀히 장수와 재상들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고 태조께 개국하기를 권하여 말씀 드리는데, 조준이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기어 같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공이 한 사람에게 있다.”하였으니, 태종을 가리킨 것이라고 기록했다.

초기의 임금과 새로운 제도 등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은 그가 그린 국가 구상과 어긋나면 누구도 남겨 두지 않았다. 대의로 보면 그에게는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다. 사사로이 보면 누구에게도 허투루 왕권을 넘겨 줄 수 없다는 욕심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국가가 정통이 아닌 방법으로 이양되려할 때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택했다. 아버지(태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최고의 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모의 아들을 세우려 하자 아버지도 물러나게 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아버지는 함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태종이 보내 함흥으로 찾아간 차사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오죽 분했으면 지금까지도 ‘함흥차사’란 말이 전해 내려올까. 배가 다른 아우들도 죽였다. 왕권 이외에는 절대로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태종인들 편했을까.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어떤 때는 평생처럼 길었다. 생사가 순간에 결정되기도 했다. 일생을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산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하는 무림의 세계보다도 더 혹독한 나날이었다.

처음부터 목숨은 돌보지 않았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다. 반대하는 세력을 회유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 심지어 중국 황제를 설득하려고 나선 것도 그였다. 혁명을 아직 추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여차하면 유학의 본질을 망가뜨린 무뢰한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다. 목숨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었으나 나라를 위해 비장한 각오로 중국으로 떠나갔다.

실록은 이때의 광경을 갑술년 여름에 중국 명나라 태조가 친 아들을 중국에 보내라 명했을 때, 태조가 태종을 보내어 명령을 따랐다. 태조가 작별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께서 만일 물음이 있으면, 네가 아니면 대답치 못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태조가 아들이고 혁명의 동지며, 공신인 태종을 보내며 흘린 눈물을 혁명동지들은 알 것이다. 중국이 승인하면 왕조가 뿌리를 내릴 수 있고, 황제가 기분이 나빠 인정치 않으면 죽어야하는 길이었다.

이런 일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5.16이후 미국에 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동갑내기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이 홀대했다고 전해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한국 국가 최고지도자 위치에 오른 것을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박정희 의장의 심정은 아마도 태종과 같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행동과 관련, 정당성 여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능과 혼란으로 백성을 어렵게 했던 전 정권을 무너뜨린 것을 태조의 혁명과 비교하면 무리일까? 여하튼 새로 세운 나라가 승인을 받느냐, 태종이 죽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었다. 그런데도 호랑이 입안으로 들어간 간 셈이다.

태종, 며느리에게 미안했다

태종은 자기 눈으로 도가 정확하게 나라를 이끌어 가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지켜보았다. 시원찮으면 왕권을 다시 찾아 올 방책까지 마련했다. 아들이라고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대로 하지 않으면 다시 시작할 각오를 다졌다. 왕을 폐위한 것이 한두 번인가. 한 번 하나 두 번 하나 마찬가지. 장자인 세자도 폐했는데 3남인 왕인들 못 갈아치울까. 그래서 군권은 자기가 가졌다.

태종은 심온 사건이 무리하게 일으킨 피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 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싸움에서 이기면 왕이었고, 갈등에서 패하면 역적이었다.’

나라를 세운지 겨우 26년. 매일매일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을 살아 왔다. 신하 그룹이 어떻게 왕권을 좀 먹는지도 보았다. 세도가가 어떻게 세력을 넓혀가는 가는 곧 자기가 해온 일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세를 불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싹만 보여도 일찍이 잘라냈다.

지나간 유행가에도 있었다. 최희준이 부른 ‘엄처시하’. “열아홉 처녀 때는 수줍던 그 아내가 첫아이 낳더니만 고양이로 변했네. 눈 밑에 잔주름이 늘어 가더니 무서운 호랑이로 변해 버렸네. 그러나 두고 보자 나도 남자다~” 큰 소리 쳐 보지만 때는 늦었다. 왕인들 어이하랴.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세자가 다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왕후의 뒤에서 처가 세력은 커져만 간다. 그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찮다. 왕권을 나눠주고 공존할 수밖에.

인지상정이다. 나이 들어가면 평생 고락을 함께 한 처의 형제자매들은 통제하기가 힘든다. 더군다나 장인이야 말할 나위 없다. 아버지 반열인 장인을 사위가 어떻게 다루어야할까. 태종은 일찍부터 이를 두려워하며 경계했다. 태종 9년 5월 19일 태종은 세자를 포함하여 아들 4형제들을 불러 모아 놓고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고는 눈물을 흘린다. 자기 장인과 처남들이 세자 제를 밀어올려 일찍 등극시키려 한 사건이후의 일이다. 권력은 비정함과 냉혹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

태종은 외척이 두려워 외척의 폐해를 세자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도 지적한다. 외척이 나중에 어찌할지 몰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같은 해 9월 4일 태종은 황희 등을 불러 말하면서 동석한 김과에게 화를 낸다. 세자가 제왕의 수신제가를 다룬 책인 ‘대학연의’를 배울 때의 일을 거론한다. 군왕에게 꼭 필요한 외가 처가 등 성이 다른 집안(戚屬)에 대한 가르침 편을 일부러 뺐다는 것이다. 이들은 겸손하고 진실해야 복을 받고, 교만하고 방자하면 화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내용을 세자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외척들이 가질 힘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종은 “이것은 온전히 외척을 두려워한 것이다. 옛사람이 저술한 글을 읽는 것도 또한 두려우냐?”고 따져 묻는다.

이런 판이니 강하지 못한 도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종의 근심이 어떠했으랴. 이를 알고도 아들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것은 아비의 자세가 아니었다. 세자 제의 처가도, 도의 처가도 이런 까닭으로 멸문이 되다시피 했다. 두 번이나 사돈집을 쑥대밭으로 만든 태종은 피눈물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이 눈물도 보이지 못하고 혼자서만 울었을 테다.

며느리 사랑은 역시 시아버지

“태종은 1422년 5월 10일에 승하였으니, 향년(享年)이 56세요, 왕위에 있은 지 19년이었다.” 태종은 아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일구월심 새로 세운 나라가 연착륙하기만을 기원했다. 아들이 무리하지 않고 모나지 않게 조정과 나라를 이끌어 가자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며느리가 걸렸다. 비록 애비는 죄인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며느리는 극구 감쌌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속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며느리를 감싼 것은 대신들이 이 사태를 구실로 벌일 수도 있는 폐비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외척의 발호가 두려워 심온을 죄주었을 뿐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도를 사랑했기에 며느리도 안쓰러웠다.

태종은 심온이 죄인이 되었음에도 며느리를 보호했다. 세종이 더 많은 후손을 두도록 위해 가례색을 세우라고 하자, 이때다 싶어 폐비를 들고 나오는 신하들이 많았다. 태종은 속내도 모르고 달라 드는 신하들을 향해 단호하게 빈과 첩을 뽑으려는 것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또 자기가 죽더라도 사돈댁의 일을 신하들이 함부로 처리할 수 없도록 단단히 조치를 했다. 1418년 11월 26일 심온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돈댁은 보호할 방안 먼저 마련했다. 중궁을 핑계로 삼았다. 중궁이 이미 국모가 되었으니 그 집안이 천민이 될 수 없다면서 “심온의 아내와 네 명의 어린 딸을 천민에 속하게 할 때는 임금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고 하였다. 얼핏 보면 임금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내심으로는 하지 마라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제로 태종은 이날 심인봉은 양민으로 남도록 조치했다.

그후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태종은 마지못해 심온의 식솔들을 잠정적으로 천인이 되게는 했지만 천인들이 하는 험한 일은 시키지 못하게 했다. 후일에 마땅히 고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태종은 죽기 전 시녀에게 중궁의 “어머니는 마땅히 천안에서 삭제되어야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 전에 태종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고 사관은 기록했다.

xaahsh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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