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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7)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2/09 [22:55]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7)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2/09 [22:55]
▲ 세종대왕 기념관(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내부

대를 이은 조선의 혁명

혁명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 이전의 왕조를 뒤집고 다른 왕조를 세우는 진짜 혁명이다. 두 번째,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잡는 일. 또는 국가나 사회의 조직?형태 따위를 폭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것이다. 세 번째, 사물의 형태나 사회활동 따위에 급격한 변혁이 일어나는 일이다. 최근 들어 세상 변화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나니, 모든 변화를 혁명으로 불러도 거부감이 없게 되었다. 인터넷 혁명, 산업혁명, 문화혁명, 시민혁명, 종교혁명, 생활혁명, 민주혁명, 공산혁명, 자본혁명 등등. 이뿐이랴. 우리에겐 1960년 4.19도 혁명이고, 1961년 5.16도 한 때는 혁명으로 불렸다. 1980년 5.18을 혁명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혁명이라는 말이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되자 무엇이 진정한 혁명인지 헷갈리겠다. 이런 판에 혁명가라고 하면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혁명의 의미를 가장 잘 전해주는 혁명가로 세종을 꼽는다. ‘세종의 혁명’이란 말에 혼동을 일으킬만하다. 거부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개국 초기 4대에 걸쳐 혁명이 이어졌다. 왕들은 조정과 양보와 타협으로 나라를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것보다 방법을 먼저 생각했다. 가장 손쉬운 것이 무력에 의한 방향 선회.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만을 앞세워 목표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혁명을 밀어붙였다. 혁명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윗 대가 말리고 회유하고 달랬지만 대를 이어 또 혁명을 일으켰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못 된 시어미 시집살이 배워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듯이 했다. 왕들은 혁명으로 집권한 뒤 반드시 ‘다시는 혁명을 해서는 안된다.’는 명분을 강하게 내세웠다. 도는 달랐다. 도가 왕권을 물려받고, 물려주기까지 조선을 돌아보자. 도는 시기적으로나, 내용면으로 보나 집안 내력으로 보나, 조선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다.

피의 혁명과 유학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성계, 조선 최초의 혁명가. 세종의 할아버지인 그는 낡은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다. 전형적 의미의 혁명이다. 피폐한 민생을 구한다는 유학의 명분을 앞세워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잡기 위해 피를 뿌렸다. 굶주리고 핍박받는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학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역성혁명이었다. 칼로 모든 것을 차지했다. 쿠데타였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거역하던 사람들의 피비린내가 한반도에 진동했다. 이성계에 반대한 사람들이 고려에 대한 충성의 징표로 흘린 피였다. 그리고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

고려 추종세력이 반대한 명분도 유학을 앞세운 신하의 도리였다. 실제로는 그러나 그들은 편하게 물려받았거나, 공짜로 얻은 자기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걸고 불안정한 곳에 배팅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되지도 않았다. 변방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주인이 되어 나타나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칼이 없었다. 내 놓을 것은 오로지 명분과 목숨이었다. 고려와의 단절은 이렇게 피로 시작되어 피로 끝났다.

혁명가 2대.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와 맞섰다.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복형제를 죽였다.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의 최고이며 동시에 최악의 자식이었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것 있을까'. 애비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큰 아들, 작은 아들, 이복 형제가 다를 것 없다는 말이다. 태조 입장에서 보면 아내는 다를지언정 방원과 방석은 같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식 중에서 방석 등이 애비보다 먼저 갔으니 이성계에게는 최고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태조가 참척(慘慽)을 당했다. 효도해야할 자식이 가장 큰 슬픔을 애비에게 안긴 것이다. 참 못된 짓을 했다. 이 보다 더 큰 불효가 있을까? 이성계는 유학 때문에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겪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버지에게 슬픔과 아픔을 안긴 것도 유학이었다. 방원이 내세웠던 왕자의 난의 근거는 장자 상속이었다. 아버지가 유학의 이론을 잘못 적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원칙을 거론했던 것. 방원은 결국 형(정조)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태종이 됐다. 이 일도 유학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건만 방원은 칼로서 얻었다. 사전적 의미의 두 번째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혁명가 3대. 도는 잠시 건너뛰자. 혁명가 4대. 유를 보자. 유는 아버지 세종의 유언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카에게서 왕좌를 탈취했다. 세종은 생전에 몸이 약한 동궁을 지키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손자도 챙겼다. 국본을 유지하라 말했다. 유의 형(문종)이 일찍 죽자 조카가 뒤를 이었다. 어린 왕을 앞에 앉히고 뒤에선 외척과 신하들이 설치려는 조짐이 보였다. 유는 조카를 돕고 싶었을 것이다. 권력은 그러나 유를 그냥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을 독차지 하고 싶었다. 돕는 삼촌을 눈에 가시처럼 보였다. 나라가 흔들렸다. 삼촌은 어린 조카대신 나라를 택했다. 로마시대 브루투스는 절친한 친구 시저를 제거하고 외쳤다.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다.’고. 브루투스의 이 말과 비교하면 억측일까. 유는 칼로 조카의 왕좌를 가졌다. 조카도 죽였다. 조선 땅에 피의 토네이도가 몰아쳤다. 두 번째 의미의 혁명이다. 세조라 불리게 되었다. 세조가 윗 대와 다른 점이라면 두 번째 의미의 혁명으로 집권한 후 아버지의 문화혁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3번째 혁명도 이끌었다.

4대째 혁명에선 걸출한 충신들이 나왔다. 아버지(세종)에게서 받은 은혜를 손자(단종)에게 바치려던 신하들이 유학의 명분과 목숨을 두고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¹ 이들은 죽었다. 사육신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등은 목숨은 버리지 않았다. 살아서 반대했다. 생육신²이다.

혁명 때마다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자기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 권력 재산 모든 것을 두고 일생 최대의 결정을 했다. 도박으로 치면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올인'이었다.³

   1)세조 2년 6월 21일 성삼문 등에 이어 17명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2)숙종 29년 10월 13일 경상도 유학자 곽억령이 함안에 조여의 사당을 짓도록 하자는 상소에 6명이 거론된다.

   3)세조 2년 9월 7일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의금부에 명하다

피의 혁명은 자기대에서 끝내길 원했다

세종으로 돌아가자. 도는 피비린내 나는 칼의 혁명에는 진저리를 쳤다. 그의 핏속에도 분명 혁명가의 냉정하며 냉혹하고 잔인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밖으로 내보이는 경우가 적었을 뿐이다. 그는 참고 기다리며 감추고 에두르고 그래도 안 되면 모른척하며 몇 백년간이라도 실행을 늦췄다. 그러면서 핏속에 숨은 혁명의 기운을 문화와 과학에 쏟고, 백성을 사랑하며 녹였다. 혁명이란 이름 아래 수 많은 사람들이 칼에 한 조각 구름처럼 스러져 가는 것도 보았다. 인생을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 말들 한다. 세종은 하지만 산 자로서 단장의 아픔을 안으로 곱씹으며 삭였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장인의 죽음도 못 본 척 넘겼다. 어쩔 수 없다 쳤다. 피눈물 흘리는 아내를, 아이들의 어머니를 보면서 한 많은 왕의 자리를 지켜야했다. 집권을 위한 터 다지기였다.

도는 왕위에 올라 태종을 안심시키는 정책을 폈고,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피를 부르는 혁명에 분명히 반대했다. 자식에게서 언뜻언뜻 보이던 혁명의 기미를 생전에 유언처럼 극구 말렸다. 애비 말을 고분고분 듣는 자식이 어디 그리 많던가. 소용없었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했다. 세종이 참고 인내하며 감춘 혁명의 피가 아들 대에서 다시 나타났다. 세종은 자식 대의 혁명을 막기 위해 신하들에게 후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더 많은 피를 불렀을 뿐이다.

조선 혁명은 개혁과 톱니바퀴처럼 맞불려 진행됐다. 혁명과 함께 개혁이 대물림되었다. 한 차례 혁명이 정리되어 갈 즈음이면 후손에 의한 다음 혁명이 뒤에서 기다렸다. 왕들은 상류층의 피를 백성을 위한 사회제도 개선과 사고의 밑거름으로 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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