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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8)

조선, 사대와 외교를 분리하다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2/15 [17:06]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8)

조선, 사대와 외교를 분리하다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2/15 [17:06]
▲ 훈민정음 영인본 (사진 세종이야기 제공)

신하들이 역으로 인정한 사대

태종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 넘어 왕위를 갑자기 도에게 넘겼다. 중국으로부터 도가 세자가 되었다는 것을 승인도 받지 않았다. 또 자신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좌를 물려줬다. 이를 내선(內禪)이라 말하지만 흔치 않는 일이었다. 신하들이 중국의 예를 찾아도 몇 번 안되는 일이었다.

태종에게서 권력을 부여 받았던 신하들이 이점을 들어 왕위 이양을 극구 반대했다. 태종이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가 이어지는데 어찌 양위냐고 들고 일어났다.

실록은 1418년 8월 9일 태종이 “내가 일찍이 나라를 전할 뜻을 황천과 종묘에 맹세하여 고하였는데, 제신들이 나에게 이를 고치라고 청하면, 이것은 나더러 하늘을 속이고 종묘를 속이란 것인가?”라며 전위 명령 취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속내는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누가 왕이 되든 자기들이 가진 권력에 변화만 없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자기들이 어렵게 얻은 권력을 새로 등극하는 왕에게서 다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계속했다. 특히 권력 이양기에 신하들의 처신을 핑계로 트집을 잡았던 앞선 왕들의 행태를 경험한 신하들일수록 불가하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들은 선왕들이 생트집을 부리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간원의 정상 등은 “전하께서 매양 하나의 영을 내리셔도 반드시 대신들과 상의하셨는데, 대사에 이르러서는 대신들과 상의하지 않으니, 어찌 이모(貽謀 : 자손을 위하여 남기는 묘책)하는 도리이겠습니까?”라고 자식들 교육까지도 들고 나왔다. 이일은 자식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다고 진언하였다.

이도 소용없었다. 신하들은 태종이 하도 완강하고 고집스럽게 버티자, 중국을 들먹이며 양위를 취소하라고 마지막 방안을 들고 상소했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올린 한 상소문의 일부이다.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하고 무릇 중대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천자에게 대문(물어서 답을 기다리어)한 뒤에 곧 감행하였는데, 더구나 전하의 지위를 조종(조상)에 내전(임금이 사사로이 전하던 명령이나 소식)하고, 위로 천자에게 받은 것이겠습니까? 천자로 하여금 이를 듣게 한다면 전하께서 능히 그가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없다고 기필(期必 :꼭 이루어지기를 기약함)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전하의 이러한 거조(행동)는 하나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또 다른 신하는 “중국에서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은 모두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신 아름다운 덕입니다. 금년 6월에 세자를 바꾸어 세우고, 8월에 전위한다면 중국에서 반드시 의심할 것이오, 후세에 듣는 자가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라고 올렸다.

“이제 국가를 서로 전함에 갑자기 부득이한 큰 사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찍이 중국 조정에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스스로 이를 행한다면 전하의 20년 동안 사대하고 공근하는 예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것이오, 반드시 중국 조정의 힐책이 있을 것이니, 장차 어찌 대답하겠습니까?”라며 태조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리라는 것도 들먹인다. 차마 천자를 속이려는 것이냐고는 말 못하고, 천자의 윤허가 없었는데 어찌 먼저 결정을 할 수 있느냐고 간하는 내용들이다.

신하들이 태종이 사대에 충실하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한 셈이다. 태종은 중국 섬기는 것을 지성으로 했다. 국내의 일을 중국에 고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을 사대에 어긋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시간을 서둘렀을 뿐이었다.

세자 도를 지켜라

도를 세자로 책봉해 놓은 뒤 태종의 속내는 참으로 복잡했다. 세자를 바꾼 것을 승인받으러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뒤이어 세자가 중국으로 가서 신고(入朝)하는 절차가 남았다. 이 날짜를 두고도 의견이 각각 달랐다. 태종은 8월 6일에 열린 회의에서 같은 달 28일로 출발일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세자가 이날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었다. 여러 이유로 출발 일정을 3번이나 늦춘 끝에 결정한 것이다. 28일 떠나면 중국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서 예상되는 일을 미리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또 18일에 떠나야한다는 의견은 가는 길에 장맛비가 내려 진흙탕 길을 가기가 어려워 채택하지 못했다.

태종은 날짜를 결정은 했지만 착잡했다. 비 오고, 길은 질고 나쁘며, 잠자리는 편하지 않다. 그렇게 험하고 먼 길에 세자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선 필수과정인데 건너 뛸 수도 없었다. 들리는 소리에 태종은 더 답답했다. 의주에서 요동까지 이르는 길에 역참이 8개가 있는데 시설이 형편 없다는 것이다. 새로 역참을 세울까 하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태종은 “더럽기가 어떠한가”고 직접 챙겼다. 또 10월에 가서 황제를 보고 나서 황제가 새해까지 머물러 있으라 하면 어찌할까 걱정도 됐다. “중궁이 편치 않다”고 핑계를 대기로 했으나 보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출발을 늦춰 북경에 머무는 기간을 한 달로 줄이자는 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머무는 기간이 한 달이냐 두 달이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북경에 머무는 기간 내내 세자의 신분은 볼모와 다름없게 되기 때문이다.

‘볼모처럼 대우 받는다.’ 태종이 가장 우려한 대목이다. 태종은 이와 관련하여  이미 심중을 드러냈었다. 7월 21일 “세자는 국본이요, 세자의 아들은 나에게 장손이 되고 또 마땅히 승계할 자이다. 더구나 세자가 이제 조현(황제를 알현함)으로 만리를 가려 하는데, 세자의 아들에게 마땅의 명위를 정하여서 인심을 하나로 하여야할 것이다.”라고 지시한다.
말은 안하지만 세자가 어찌 될지 모르니 세손을 정해 놓으라는 뜻이다. 옛날 제도를 참고 하고 살펴서 보고하라는 심정을 이해할만 하다.

태종이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어 중국과 갈등을 빚는다면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중국을 이해시키고 달랠 방책을 어떻게 찾을까 걱정했다. 안전한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8월23일이다. 태종은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지켜보았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 세자 책봉을 승인한 칙서를 가졌다. 황제를 모시듯 사신이 가진 칙서를 받들어야한다. 사신을 영접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태종이 맞을 것인가, 새로 왕위에 오른 도가 맞을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이 결론을 내렸다.

실록은 “부왕(태종)의 병환은 때 없이 발작하기 때문에, 이제 세자로 하여금 임시 권도로 집무를 대행시키기는 하였으나, 세자 책봉하는 주청도 아직 인준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전위를 주청하지 못하였사온데, 지금은 부왕의 병환이 조금 차도가 계셔서 병을 무릅쓰고 칙령을 맞이하려 합니다.”라고. 이종무가 명을 받들었다.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겠다

태종은 중국을 섬기는 것은 추호만큼의 흐트러짐이나 빈틈을 용납지 않을 심산이었다. 황명을 가져온 사신을 칙사로 대접하고 그를 모실 계획이었다. 반면 도를 북경에 보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아버지 대신 고명을 받으러 가던 험한 여정에서 겪은 일을 다시금 반복케 할 수 없었다. 태종은 세자를 사지가 될지도 모를 길을 떠나게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또 세자비가 만삭이라 출산이 가까웠다. 세자 없이 손자를 볼 수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중국이 내정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도를 임금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도가 임금이 되면 중국인들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8월 8일 세자에게 국보를 주면서 이 속내를 확실히 드러냈다. “세상의 사고는 때가 없이 생기고”라며 경호상의 문제를 제일로 들었다. 왕에 대한 경호가 완벽하다고 쳐도 사고가 나는데 조선에서 중국까지 그 먼 길에서 완벽한 경호를 기대하기가 곤란하다. 만약 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을 앞세웠다.

“만기의 몸은 가볍게 길을 갈수가 없다”고도 했다. 임금이 국내를 오랫동안 비우면 국가 통치에 차질이 있기 때문에 자릴 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핑계도 말한다. “내가 8월 초4일에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자문(외교문서)을 보내어 주문하면, 황제가 반드시 고명을 내려 줄 것이니”라며 방책을 제시한다. 그에 대한 답례로 “금 은 마필로써 사례하여야 할 것이다”고 명했다.

덧붙여 중궁의 병이 위독하고 태종의 병이 다시 발작하니, 도가 북경에 갈 수 없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임신한 아내를 떨어지게 함은 유학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도 강조했다. 태종은 “황제가 어찌 외국의 일을 가지고 힐난하겠느냐?”고 내정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때의 사대와 외교 분리가 조선을 조선답게 만드는 기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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