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신들은 한양 조정에서만 선물을 챙기지 않았다. 오가는 길목의 지방 권아 관리들에게서도 선물을 받았다. 억지로 물건을 강매하기도 했다. 사신들의 횡포가 늘어가자 조선은 여러 차례 대응방안을 논의하고 방책을 세웠다. 조선은 여러 가지 법과 제도를 마련했다. 세종은 1429년 예조가 ‘지방 관원들이 사신에게 물건을 주거나 사신들의 (판매)청구를 받아들이지 말게 하라’고 건의하자 받아 들였다. 선물을 받으면 꼭 답례를 하는 풍속을 사신들이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다. 아름다운 우리 풍속을 역이용하여 잇속을 채우던 사신단의 횡포를 금지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신들은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우리 관원, 백성들에게 덤터기를 씌우곤 했다. 사신들에게 사사로이 선물을 주고 가까이 하여 혹시 불편한 관계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을 만든 것이다. 원인행위를 아예 근절하려는 고강도 방안을 내놓았던 셈이다. 한 관리는 물건을 하도 많이 챙겨서 물건을 보관할 창고까지 우리에게 지어내라 강요했다. 또 다른 사신은 말 5천필을 요구했는데 이를 보내려고 말 먹일 먹이까지 대주려다 보니 동원된 주민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한번은 중국 사신이 경비병이 가지고 온 물건의 매매가 늦어지자 화를 내었다. 사냥을 하다가는 들판에 소와 말이 보이지 않자 판관을 불러 자기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숨겼다고 떼를 썼다. 인삼과 베만을 판매허가한 사실을 가지고는 “중국 사신이 왕래할 때에는 수령들로 욕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며 공갈과 협박도 했다. 이 사신들이 정상적인 외교보다는 돈벌이에 급급하여 우리 장사치들과 거래에만 몰두 하자 영접을 담당한 관리가 “사사로이 통하여 매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게 되니 사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사신들은 그러나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관리에게 매를 때렸다. 이 관리가 고약해라는 사람이다. 이홍 광운대 교수는 요즘 쓰는 고약하다라는 말이 “일설에 의하면 세종조에 있었던 고약해라는 신하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 사신을 원칙대로만 모셨던, 임금에게 반기를 든 고약해 이후 “고약해 같은 놈”이라고 사용됐다 했다. 중국 황제도 사신들의 폐해를 알고 있었다. 오죽 했으면 칙서로 사신들에게 물건을 주지 말라고 알렸을까? 그런데도 사신은 “칙서에 물건을 주지 말라”고 한 뜻을 모른 채 오로지 탐욕에만 빠져 있었다. “칙서가 오기 전에는 무릇 그들의 수요와 요구를 좇지 않는 것이 없었고, 증유물도 많았다”고폐해를 언급했다. 칙서를 사신에게 보이니 태도를 바꾼 척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스스로 준 선물에 대하여는 아마 예외가 있었나 보다. “칙서를 본 뒤로는 청구하지는 못하고, 물건을 기증하므로 인하여 그 값을 많이 받으려” 했다. 기증하고는 물건 값을 청구하는 파렴치한 태도였다. 사신들은 전처럼 강탈하듯 달라고는 못했지만 물건을 내놓으라는 발칙한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사신은 “새해가 가까와 오는데, 내가 채단과 띠를 전하께 바치려고 하나, 다만 회사(回謝 돌아오는 선물)가 적을까 걱정이로소이다.”라고 세종에게 전해달라는 뜻으로 인사차 찾아간 대신에게 말했다. 세종은 그의 선물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주는 것이 아니고, 모두 물건을 낚아채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탐하고 무례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고 불편한 심정을 밝혔다. 세종이 칙서를 들어 폐해를 근절시키려 하자 맹사성 등이 “환시(환관)는 예의를 돌아보지 않으므로, 그 욕심이 무궁하여 다 들어주기 어렵습니다.”며 “칙서 내용의 뜻을 극진히 말해 그(사신)의 기증을 받지 말고, 또 사적으로 주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고 세종의 뜻을 받들었다. 반면 다른 신하는 “하루 아침에 증여를 딱 끊어 버리고, 또 기증해 오는 것도 받지 않는다면 저들이 앙심을 품을 것”이라면서 주어야한다고 말한다. 여러 의견을 종합한 세종은 “이번에 이것을 단절해 버리지 않는다면 뒷날에 김만(사신 이름)의 본을 받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라며 말이 난 김에 시행을 결정한다. 세종 이후에도 중국 사신들의 뇌물요구와 횡포는 조선 내내 계속 되었다. 아니 조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방 외교관계 때문에 따지지도 못하고 넘어간 사건도 많았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일방 외교는 어떤 면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언젠가 광화문이 중국학생 시위대에게 점령되어 있을 때 국민들은 분통과 함께 낙담했다. 그리고는 예의 그 ‘약소국의 비애론’을 끄집어냈다. 그 말을 씹고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나라 세운지 7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린 무얼 했단 말인가. 주변을 돌아보면 미국에 유학갔다 온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제시대 미국 유학생은 극소수였다. 그 소수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일부는 국가를 건설했다. 해방이후에는 미국에 유학 갔다 온 많은 사람들이 국가 고위직에 앉았다. 그런데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느냐고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미국과 밀고 당기며 우리에게 손해가 없도록 무역협상을 마쳤는데 그걸 뒤집으니 국민들이 화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한 말이다. 최근에는 북한에 핵무기가 10여기 있을 것이라고 미국 연구기관들이 발표하고 있다. 미국 정부와 주한 미군 고위 장성들도 같은 내용을 부인하지 않는다. 핵은 핵으로만 견제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린 미국에게 할 말이 없는가?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고 왜 우리만 옥죄고 있느냐고 말할 수 없나. 대안을 내놓으라 당당하게 요구가 불가능한가.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를 견제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어떤가. 북한과 엄청난 평화 협상을 한 것처럼 발표하고 정상들이 갔다 왔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 역시 더러운 거래가 뒤에 숨어 있었다. 최근에 중국과 하는 각종 협상에서도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과의 외교는 관시(?系)가 답이다. 고고도 미사일체계도 관시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우리가 아팠던 것은 아팠다고 이야기 하자. 그리고 시작하자.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단기 효과를 위해 포기한다면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신에게도 뇌물을 요구 공짜로 선물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만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어려움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선물을 주고받아 생긴 인간관계로, 사사로이 도리에 어긋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맞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뇌물에 익숙한 중국 황실의 환관들은 조선이 보낸 정식 사절에게도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했다. 황제를 빨리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편의 제공이 미끼였다. 중국과의 외교를 담당한 예조에서 오로지 내관(환관)만이 아니라 중국의 외교를 담당한 관리도 역시 공공연히 뇌물을 받고 있으니, 예 사람이 이른바, 회뢰를 공공연히 행한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사신들을 괴롭힌다고 말했다. 조선에서 사신으로 갔던 한 사람은 문지기(제화문 파수꾼)조차도 “우리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입모(笠帽 비나 눈 올 때 갓 위에 덮어씌우던 고깔 비슷한 물건)를 주기로 한 뒤에 들어갔다.”고 비난했다. 이 보다 훨씬 뒤인 1780년 연암 박지원도 중국에서의 일을 열하일기로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황실 내관들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중국의 뇌물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할 만큼 만연되어 있다. 이 습관을 고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중국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미래학자들까지도 있다. “백성이 모르게 하라”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하면 국민이 모르게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비밀협상을 해 놓고도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그나마도 애교로 봐줄만 했다. 엄연한 사실을 숨기며 바른 말을 했다고 무지한 백성을 벌 준 것은 얼마였던가.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죄목을 씌워 죄를 준 것도 부지기수다. 어떤 잘못을 벌하겠다고 수사를 하다가 아무 것도 잘못한 것 없음을 알게 되자 엉뚱한 것을 트집 잡아 생사람을 죄주고, 매장시킨 사례는 또 얼마인가. 오죽하면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 유행할까. 무지한 백성들은 법조문은 몰라도 법보다 더 무서운 도덕은 잘 안다. 자기 힘으로 안되면 고개를 돌렸지만 상류층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을 더러운 잔상을 지워 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세종 때도 때로는 백성들 모르게 외교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엔 대중매체가 발달 되지 않아 요즘처럼 속보성은 뒤떨어졌다. 전파력도 약했다. 하지만 옳은 것에 목숨을 거는 유생들이 뒤에서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을 의식했다. 여론을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워 한 현군의 자세를 보였다. 백성들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 우리에겐 그 때 유생들의 기개가 없는가? 세종은 집권 27년차인 1445년 1월 19일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의주에서 관청이 요동과 무역하는 것을 백성들이 모르게 하라”고 유시했다. 당시 의주에서는 직물을 짜고 염색하며 진상하던 일을 담당한 제용감의 베를 수출하게 했다. 수출 허가 품목이었던 것이다. 수출은 관청이 담당케 했고 일반 백성들은 금지한 상태였다. 허용했다 하더라도 제용감의 베는 관청이 우선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관청끼리 업무협조를 할 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들의 구하기 어려운 제용감의 베였으니 관에 의한 일종의 무역 독점이었다. 의주에서는 그러나 오래전부터 사신들과 함께 온 중국 경호를 담당한 군인들에 의한 거래가 행해지곤 했다. 중국 경호병들이 가져온 물건을 팔고, 돈 될 물건을 사갔다. ‘이문 있는 곳에 장사꾼들이 모였다.’ 정보가 빠른 서울 장사꾼들이 끼어들었다. 서울 장사꾼들은 국가의 금지품목을 몰래 가지고 가 중국에서 나오는 경호병들을 기다렸다. 보통 의주사람들을 앞세워 경호병들과 거래를 텄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 하는 인삼 가죽 등이 밀거래 품목이었다. 세종은 그러나 이런 실정이 경호병들에게 들통나 알려지면 곤란한 지경에 이를 것을 우려했다. 트집이 잡혀 시끄럽게 될 것을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가르쳤다. “관에서 무역하는 형적을 드러내지 말고 트집이 생기지 않게 하라”고 당부했다. 비록 변방에서의 일일지라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매사 조심했다. 혹시 아래 사람들이 실수할 것조차도 단속한 것이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