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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24)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5/17 [10:47]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24)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5/17 [10:47]

훈민정음으로 과거를 보다

세종은 기존관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는 보급에 속도를 가했다. 가장 빠르고 쉽게 보급하는 방법은 각종 국가시험에서 훈민정음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시험에 곧바로 훈민정음을 시험과목으로 시행케 했다.

지금은 대학 입시와 대기업과 주요 공기업 입사시험에 어느 과목이 포함되느냐에 따라 중고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이 달라진다. 입시위주의 교육이다. 대학에서는 심지어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내용으로 아예 교과목을 바꾸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맞춤형 교육이다. 진정한 학문과는 관계없다. 입시와 대기업이 요구하는 실용기술 쪽으로 교육과정이 정해져야한다는 주장이 만만찮은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용문인 과거에 어느 과목이 포함되느냐에 따라 선비들의 공부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와 기타 여러 학문이 시험과목이었다. 모두가 중국의 것들이었다. 시험에 응시할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7만자에 달하는 한자를 익힌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에게 훈민정음을 추가로 공부하게 한다면 새로운 문자의 파급 효과는 만점이었다. 훈민정음을 단기간에 전국 지식계급에게 확산시키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식계급이 알면 그 아래 일반인들은 저절로 배워야하는 과목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관리가 된 사람들은 훈민정음에 소극적일 수 있다. 이미 관리가 되었으니 관심을 쏟지 않아도 된다. 또 문자를 아는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들의 권위가 올라갔다. 문자를 안다는 것이 신분상승과 직결되던 시대였다. 그래서 관리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문을 사용하는 과거시험을 주장했다. 과거시험 과목으로 자신들이 아는 문자로 된 것을 채택해야 자신들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28년(1446년) 12월 26일 이과(吏科; 세종 8년부터 실시된 잡과 시험으로 서리 중 상위 계급을 뽑았다)와 이전(吏典; 지방 관아의 하급 관원)의 채용 때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리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고 명령을 전달케 했다. 일반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지방의 하급관리 시험이었다. 세종은 가장 빠른 보급효과를 볼 수 있는 계급을 첫 번 째 대상자로 택했다. 참 용의주도한 임금이다.

훈민정음 반포이후 석 달 반 만에 시행되는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시험하라 했으니 그 혼란이 얼마나 되었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수험생들은 당황했을 수밖에. 세종은 이를 감안하여 음소 28자를 알고 이를 합하여 글자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면 뽑게 했다. 초중종성을 합해야 능히 글자가 된다는 이치를 알면 합격이었다. 즉 훈민정음은 소리를 적는 글자라는 표음의 이치와 소리를 만들 줄 알면 됐다. 훈민정음 반포 후 100일도 안되었는데 시험을 치르게 한 것은 훈민정음이 그만큼 쉽다는 것을 알리는데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정인지가 서문에서 이야기했던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는 내용을 확인하는 기회도 되었겠다. 한문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세종은 한 술 더 떠서 반년이 지난 시점인 29년(1447년) 4월20일에는 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 보도록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만 다른 시험을 응시케 하였다. 훈민정음이 대입수험의 예비고사였다. 아무리 전공 실력이 우수하더라도 훈민정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 뿐 아니었다. 4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각 관아의 관리 시험에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게 했다. 그러니 관리가 되려던 사람들은 모두가 훈민정음을 공부해야만 했다. 시험과목이 변경 되었으니 전국적인 동요가 있었을 것이나 실록에는 상세하게 나와 있지 않다.

관리들도 훈민정음은 의무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는 언문청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니 훈민정음으로 창작된 최초의 작품을 만들었다. 언문청은 언문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정음을 만들고서도 정음이란 말도 쓰지 못한 채 언문연구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뒤에 정음청으로 바뀌기는 하나 그 설움이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세종은 기존의 관리들에게도 훈민정음을 사용치 않고는 배겨 나지 못하게 방법을 썼다. 일종의 정책집행이었다. 책자 훈민정음을 반포 하고 한 달 만에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려 보냈으니 훈민정음을 모르고서는 왕명의 출납은 물론 시행도 못하게 된 것이다.

세종은 28년(1446년) 10월10일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썼다. 대간들이 누구인가. 관료들의 잘못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대관과 임금의 실정을 지적하고 비판하던 직책의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의 잘못을 훈민정음으로 적어서 내려 보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우선 왕의 잘못이나 실정을 지적해야할 대간들이 자신의 죄명을 훈민정음으로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는 불문가지다.

이보다 한 달 뒤에(11월 8일)는 용비어천가(1445년)에 내용을 첨가하기 위하여 사관들에게 실록을 내놓으라 했다. 사관들은 그러나 “실록은 사관이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거절한다. 세종도 여기서 물러나 어효첨 등에게 실록내용을 뽑아서 바치게 했다.

세종은 또 세자의 공부 과목에도 훈민정음을 집어넣었다. 세자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서연관이 모두 10명이었다. 이중 4명이 언문과 의학을 강연했다. 많은 과목을 서연관 8명이 맡은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서연관들이 이를 빌미로 겸직을 하지 않고 서연만을 담당케 해달라는 상서를 이조에 내려 보내 검토케 했다. 모든 정책을 각 부서에서 토의하고 논의를 거쳐 결정케 하니 업무가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세종은 드디어 집현전에 언문으로 중국의 사서(四書)를 번역하도록 명령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겠다던 명분을 충실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일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그룹에 끼어들었다가 세종에게 혼이 난 김문이 담당했다. 김문이 도중에 죽어 후임자로 상주에 내려가 있던 김구를 급히 불러올려 맡겼다. 김구가 역마로 불려 서울에 도착했다. 화급한 일처럼 역마를 활용했다. 조정 관원들이 왕의 특명을 이 일만으로도 충분하게 알았을 터. 세종 30년(1448년) 3월28일에 있었던 일이다.

이뿐 아니었다. 불교에 관한 책들도 번역하거나 정리하여 간행했다.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1447년)을 번역케 했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집대성하여 훈민정음으로 간행케 했으니 왕자들이 훈민정음 작업에 직접 참여했고, 중요한 직책을 맡았음을 느낄 수 있다. 세종도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수양이 석보상절을 만들어 올리지 이를 보고는 서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1449년)을 지었다.

이중 문자제도가 시행되다

왕은 물론 왕자들이 모두 나서 펼친 훈민정음은 국가의 최대 현안이었다. 세종은 그러나 이를 모든 일에 앞서 강요하지는 않았다. 국가의 공식문자는그대로 한자였고, 모든 공식문서는 한문으로 작성 했다.

세조가 왕이 되어서는 훈민정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문과에서는 훈민정음을 강의하고 시험 보게 했다(1460.5.28). 세종 때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세조는 아버지가 보급에 힘쓰던 훈민정음을 아예 과거시험 과목으로 공식 확정했다.

그 후에도 일반인들은 쉬운 문자에 매료되었으나 공식문자는 아니었다. 이로서 국가에는 일반백성의 훈민정음과 공식의 한문으로 된 이중의 문자제도가 각각 따로 운영된 셈이다. 일반 백성이나 왕실의 부녀자들이 훈민정음으로 작성한 기록은 공식문서로 인정되지 않고 한 개 기록에 불과했다. 재판을 하거나 왕실에 공식으로 요청하는 문서는 한문이어야만 했다. 이런 상태가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나서 향후 약 450여년이나 계속 됐다. 한글이 서자 노릇을 하던 시기였으니 우리 민족의 설움을 간직한 시기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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