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이 병마에 시달리다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번역하느라 힘들었다. 이에 앞서 동궁(후에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일을 돕느라 제대로 건강을 돌볼 수 없었다. 세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동궁이 아버지 앞에서 아파 눕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에 차질이 올까 우려했다. 조선 최고의 중요한 일을, 어린 세손(후에 단종)이 중국 사신이 가져온 외교서류를 받는 상황까지 거론됐다. 동궁의 병이 깊어 일을 처리하기가 힘들어지자 세종이 동궁이 하던 일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31년(1449) 11월 14일 “동궁의 병이 오래 되었으니 아직도 차도가 없는데, 정월 이전에 아뢸 일도 반드시 재가를 얻지 못하였을 것인즉, 모든 서무는 내가 친히 결정할 것이니 혹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계문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결재가 급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뤄둔 것이 있으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혹 결재를 받지 못해 국사에 차질이 있을까 배려한 것이다. 아들의 일을 아버지가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니 궁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나이든 세종이 아니라 젊은 동궁의 건강이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이다. 그 뒤 동궁의 병세에 차도가 있자 온 조정이 기쁨을 표시한다. 같은 달 18일자의 기록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종기근(종기가 난 곳에 있던 뿌리를 말한다)이 어제 빠졌으니 내 심히 기뻐하노라.” 세종의 기쁨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2품 이상의 모든 신하들이 몰려가 동궁의 병세가 호전된 것을 반긴다. 완쾌를 치하하는 시를 지어바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동궁의 치료를 잘못했다하여 내의원들의 직첩도 빼앗았다. 직위해제인 것이다. 세종 31년(1449년) 12월 24일 조정에서는 왕세손이 사신을 맞게 하는 일의 가부를 논의했다. 이미 동궁의 병이 아직도 완쾌되지 않았음을 알겠다. 이쯤 되니 조선은 건국 후 60년도 안되어 나라의 운명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으로 몰려갔다. 이미 시작된 동궁의 병은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기로 했다. 조서를 받는 일을 놓고 논의가 있었다. 세종과 동궁 모두 병중이라 사신들로부터 조서를 직접 받지 못하자 세손을 앞세우기로 했다. 32년(1450) 1월18일 세종은 동궁 대신 세손을 내세우면서도 근심이 태산 같았다. 나이어린 세손이 치렁치렁 긴 예복을 입고 나아가고 들어가다가 혹시라도 넘어지거나 다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걱정하는 세종을 본 신하들이 왕자(수양)가 대행하고 나중에 동궁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내놓는다. 한 나라 정상의 건강이 이처럼 중하다. 외교 국방 등 막중한 국사를 결정하는 정상은 늘 외롭고 고독하며 힘이 든다. 세종 32년 윤 정월 20일 중국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이날 동궁이 종기가 세 곳이나 되어 사신이 가는 것을 전별하지 못했다. 동궁대신 수양대군이 가서 환송연을 베풀고 그들이 가는 길의 안전을 기원해야만 했다. 전별연에서 사신들이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이 일을 거론하고 나섰다. 두 사신은 “전하의 병은 명나라에서도 모두 아는 바이지만, 세자의 병은 우리들이 황주에 와서야 처음 들었으므로, 만약에 친히 맞이하지 아니하면 비록 해를 지날지라도 반드시 병이 차도 있기를 기다리려다가 들어오니, 이때서야 세자가 할 수 없이 조서를 맞이하고, 그 뒤에는 한 번도 나와 보지 아니하니, 세자가 천승국저(千乘國儲 제후국의 동궁이라는 뜻)이니, 우리 같은 미관말직의 사람이야 그 무엇을 족히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명나라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이는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기분 나쁘다고 명나라를 들어가면서 이야기 한다. 최고의 경고인 셈이다. 수양대군이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어야만 했다. “두 대인이 돌아가 친히 세자의 병을 보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가히 알 것이다.”라고 진화에 나섰다. 사신은 “병들었거나 않았거나를 무엇하러 가보겠는가.” 하니, 수양은 “병세가 지극히 위중하여 부득이 이에 이른 것이니, 어찌 감히 병들었다고 칭탁할 것인가”하고 진실을 이야기 했다. 수양의 간곡한 설득에 사신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렇다면 상불괴우옥루(尙不愧于屋漏 방안에서 혼자 있더라도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로다.”라고 말했다. 이 때 수양이 동궁에게 세 곳이나 종처가 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니, 사신들이 의심을 풀었다고 실록은 기록했다. “왕자(수양)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석연하다.” 동궁의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수양의 말을 전해들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세종도 놀랐다. 사신들을 달랠 필요가 생겼다. 벽제역으로 사신을 이해시킬 특사를 파견했다. 세종은 아무리 낮은 직급의 중국 관리가 오더라도 정성을 다해 영접했는데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소홀하게 할 수 있겠느냐면서 사신을 따라온 두목 한 사람을 보내 확인하라고 요청한다. 세종은 세자가 아프지 않은데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다면 “하늘을 속이고, 황제를 속이는 것이며, 또한 두 대인을 속이는 것이니, 내 비록 덕이 없을지라도 임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이 같은 간사한 일을 차마 하겠소.”라고 소위 말하는 직을 걸고 거짓이 아님을 중국 사신들에게 맹세한 것이다. 일이 벌어진 것은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 보낸 윤형에게 세종과 동궁이 모두 병중이라 나오지 못했음을 전하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였다. 대신이 업무의 경중과 완급을 알 터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욕됨이 임금에게 이르렀다고 사관들은 기록했다. “비록 응대하는 재주가 없을지라도”라며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동궁의 병이 이같이 깊었음을 알게 되니 그 병의 원인을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기록에는 달리 표현이 없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극비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자 동궁도 옆에서 쉬고 있지는 않았을 것. 또 훈민정음 책자를 만드는 프로젝트팀에 참가한 형제들을 지휘하는 입장이었으니 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로가 큰 원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아버지를 뛰어 넘으려는 아들이 성취한 업적이 그에 못 미칠 때 아들들은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학술적으로도 알려진 이론이다. 그러니 동궁이 세종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결과 몸이 허약해지고 온갖 병에 시달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수양은 동궁이 아니었다. 임금을 뛰어 넘어야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자유로웠다. 학문을 닦고 힘을 기르는데 비교적 부담이 적었다. 튼튼한 왕자였다. 동궁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미 했다. 양녕이 세종보다 오래 산 이유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세조 훈민정음을 발전시키다 수양이 나중에 세조 임금이 되어 훈민정음을 발전시킨다.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가 훈민정음을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는 가를 보았기에 가능했다. 세조 6년(1460) 5월 28일 예조에서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등을 문과 시험에 넣자고 하자 허락한다. 이들 실험 과목의 점수 배분을 사서(四書)와 같게 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의 유학만큼이나 우리 것을 강조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받은 그대로 시행케 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긴급지시로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을 이제 정식 법령으로 확정한 것이다. 그때까지 당락을 좌우했던 중국의 사서 등과 같게 하여 우리 것을 상대적으로 높이게 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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