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혁명 코드를 심었다 훈민정음의 가운데소리(中聲)가 조선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음은 이미 언급했다. “ㅛ,ㅑ,ㅠ,ㅕ起於l 而兼乎人 爲再出” 즉 ㅛ,ㅑ,ㅠ,ㅕ는 반모음 l(사람)로 시작하여 초출자인 ㅗ, ㅏ, ㅜ, ㅓ와 합해 소리가 난다. 하지만 결국에는 ㅗ, ㅏ, ㅜ, ㅓ로 소리가 끝난다고 설명했다. 오늘의 활자로 보면 ㅛ,ㅑ,ㅠ,ㅕ에 하늘이 두 번씩이나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훈민정음을 보면 ㅛ는 땅(ㅡ)위에 하늘이 두 개가 올라 있음을 보게 된다. ㅛ자의 하늘 두 개 중 앞의 것은 “而兼乎人”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글자도 같다. 이렇게 하여 발음은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했는데, 표기는 하늘로 했다. 그러므로 앞의 하늘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곧 사람이 하늘이 되는 것을 문자에 담았다. 人乃天(인내천)이다. 훈민정음은 단순하게 소리를 적는 글자가 아니다. 문자 자체가 철학이다. 거기에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 사람을 존중하는 인본사상도 들어 있다. 어둠이 짙었던 15세기에 사람을 가장 중요한 하늘과 일대일로 대응시킬 생각을 한 것은 혁명이다. 사상의 혁명이며 정치혁명이다. 훈민정음에는 이처럼 조선 백성이 만물의 영장을 넘어 곧 하늘이라는 뜻을 심어 두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아래아(ㆍ)에 소중한 보물 같은 중요한 의미를 담아 놓고는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조선 백성이 매일매일 입에서 하늘을 쏟아내기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백성의 말이 곧 하늘이 될 때까지 놓아둘 심산이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하늘의 뜻이 백성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고대한 것이다. 만인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고 했던가?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성덕왕 때의 일이다.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되어 부인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임지로 가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 천길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철쭉꽃이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꽃을 갖고 싶었으나 누구도 응하지 못했다. 소를 몰고 지나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와 헌화가를 부르며 바쳤다. 이틀 뒤 다시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는데 동해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또 노인이 나타나 “옛사람의 말에 뭇 입김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이제 바다 속의 한 축생이 어찌 뭇 사람들의 입김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경내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노인의 말대로 ‘해가(海歌)’를 부르며 바닷가를 치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왔다. 만인의 입이 이긴 것이다. 세종도 훈민정음이 백성들의 모든 어려움을 아래아(ㆍ)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이 계획이 들어맞았다. 아래아(ㆍ)가 우리말에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다. 모음자의 첫 번째 글자인 아래아(ㆍ)가 하늘을 나타내면서, 조선 백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언어를 사용하는 선민이 되었다. 이 선민은 지배계급 즉 양반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라는 것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다. 이는 전제군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우리에게 섭섭할는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2000년간의 이민족 박해와 핍박을 받았는데 이겨냈다는 것이다. 우리 훈민정음은 창제되고 450년가량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 때까지도 우리는 공식문자로 한자를 가졌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그 기간에도 생명력이 감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은 신념이 녹아들었다. 우리가 하늘을 우리언어 생활 속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깊은 속내를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참 속 깊은 왕이었다. 백성을 위해서는 자기 하나는 희생해도 좋다는 각오를 가진 임금이었다. 조선 백성을 하늘과 같은 격으로 올려놓은 세종의 깊은 뜻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위정자들은 얼마나 이를 실천해 왔는가. 세월호 사건도, 연금제도 개혁도 강한 신념이 없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세종은 보면 볼수록 우리의 긍지를 하늘에 올려놓은 성군이었다. 수양대군,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다 세조의 이야기를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다. 세조의 등극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양녕이다. 양녕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평생을 세종의 비호와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세종이 그를 감쌌다. 사사롭게는 형이었다. 형제의 우애는 돈독했다. 주위에서 양녕을 여러 차례 여러 죄목으로 탄핵해도 세종이 듣지 않았다. 심지어는 양녕의 아들까지도 끝까지 돌보았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살아있을 때도 양녕을 불러 위로하고 그의 생활을 보살피는 등 형제간의 우애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세종이 양녕을 불러 형제의 우애를 보인 것은 효자의 최고 모습이다. 아버지의 마음에 아픔을 주지 않으려는 깊은 생각이었다. 강한 태종이었지만 아들의 아픔을 뿌리친 것은 아니었다. 세종에게 세자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할 때 태종이 흘린 눈물이 이를 말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세종은 양녕을 따뜻하게 보살핀다. 세종은 4년(1442) 2월 20일 양녕이 찾아오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제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기록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양녕이 학질에 걸리자 세종은 어의를 보냈다. 환관을 보내어 위로했다. 왕이 직접 찾아가지 못할 때 하는 예우였다. 어의뿐이 아니었다. 양녕이 평소 의탁했던 중을 보내 주문을 읽게 했다. 이렇게 자상한 아우가 있을까. 생활이 불편할까봐 식생활까지도 보살폈다. 조선시대 얼음은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던 중요 품목이었다. 서빙고 동빙고의 얼음은 왕실용이었다. 이 얼음을 매일 한 덩어리 씩 양녕에게 내리기도 했다. 양녕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 세종은 여기까지도 고려를 했다. 2년(1420) 5월20일 양녕대군에게 환관을 보내 술 20병을 전달했다. 말린 양고기 3마리도 안주로 보냈다. 조기 2백 뭇(10마리) 그러니까 2천 마리도 선물에 더했다. 말을 즐겨 타는 형을 위해서 말에 관련된 기구 등도 추가했다. 이런 형제가 어디에 있을까. 태종이 세상을 뜨고 나서도 이런 일은 계속 됐다. 아버지 3년상에는 특별히 초대하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왕은 자기였지만 장손인 양녕이 제사를 주관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동생이 잘 살거나 벼슬이 윗자리에 오르면 형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부자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신문에 5단 통의 커다란 부고를 내면서 형을 완전 무시하여 눈총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 왕인 세종은 형을 장손으로 예우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양녕의 아들이 살인을 해도 그를 이해하고 돌보았다. 벼슬은 삭감했지만 큰 벌은 내리지 못했다. 집안의 장손이었다. 이렇게 세종의 보호를 받은 양녕이 결정적인 시기에 위험에서 왕실을 구했다. 세종이 세상을 뜬 후 문종이 왕통을 이어받았다. 몸이 약한 문종은 2년 조금 넘게 집권했을 뿐이다. 뒤를 이은 단종은 1452년에 왕위에 올랐다. 우리나이 나이 12살(1441년생)에 왕이 되니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권이 유생들과 외척의 간섭이 심해질 조짐을 보였다. 건국이후 왕권이 흔들리는 최대 위기의 순간이었다. 양녕은 왕실을 위해 아버지 태종이 자기를 세자에서 내려놓게 한 뜻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때 양녕의 나이가 59세. 이순(耳順)의 나이에 도달해서야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 양녕은 수양이 왕실을 위해 거병하자 적극적으로 거들고 나섰다. 수양이 김종서를 제거하고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조카가 나라를 구하러 나서자 자신도 사사로운 감정을 접고 왕실을 택했다. 유교의 명분으로 보면 역적이었지만 국가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 태종이 한 일을 누구보다 잘 안고 있으면서, 몸소 체험한 그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양녕이 두 번이나 나라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이래서 나왔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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