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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28)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5/17 [11:16]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28)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5/17 [11:16]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실

태종이 계획한 조선의 마스터플랜

세종은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조선 천년의 영광을 계획했다. 문자에 코드를 심었다. 책자 훈민정음을 편찬하면서는 아버지 태종이 계획한 조선의 마스터플랜과 일치시키는 작업을 했다. 마스터플랜은 세종을 거쳐 세조에까지 잘 내려갔다. 왕위계승에 잡음은 있었지만 신생국가의 정착을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었다.

마스터플랜의 골자는 왕실이 신료그룹보다 위에 있으면서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백성을 계몽하여 왕실의 입지를 튼튼히 하자는 것이었다. 왕실이 곧 조선이라는 뜻을 담았다. 이에 신료그룹은 백성이 깨어나면 자기들의 입지가 축소될 것을 뻔히 알기에 음과 양으로 이에 저항했다.

마스터플랜에 불만을 품은 신료그룹은 언제든지 튀어오를 스프링처럼 유학이라는 송곳을 주머니에 감춘 채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왕권이 약해 보이면 튀어 올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들이 실속을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용되는 것이 늘 외세 즉 중국이었다. 유학의 종주국이라는 것이 그들이 내세우는 최고의 논리였다. 중국은 이를 싫어 할리 없었다. 변방이라 감시가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잠정세력(조선왕실)의 반대파(신료그룹)가 스스로 추종하겠다는 것을 뿌리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불감청이나 고소원이었다.

중국은 여차하면 왕실에 대하여 여적죄까지도 불사하던 조선 양반과 신료그룹에게는 피난처이며 도피처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주는 보루였다. 조선 왕의 힘을 꺾는데도 이용되었고, 큰 이권을 독차지하여 자기들끼리 나누는데도 동원되었다. 이 때 국내세력을 도와 이권을 함께 챙긴 외국의 그룹이 중국으로 보내진 환관들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환관들의 횡포는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백성들이 글을 알고 논리를 터득하게 되기 시작했다. 신료그룹이 신봉하는 유학의 논리를 백성들도 알게 되었다. 절대군주인 왕이 스스로 계몽군주가 된 결과였다. 조선의 기초혁명이었다. 신료그룹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글을 아는 백성들이 늘어 갈수록 신료그룹의 존재가 위태로움으로 몰려갔다. 그 때마다 신료그룹은 ‘유학원리주의’그룹으로 변해갔다.

단종 1년(1453) 10월 10일 실록은 “노산군(단종)이 어리어 권세가 정부로 돌아갔다.”면서 수양대군이 신료그룹을 리드하던 이현로를 매질하자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였다.”고 적었다. 이에 수양은 더 두면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했다. 수양은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라고 결연히 일어섰다. 수양은 가동 한 명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수양도 신료그룹의 ‘원리주의’에 맞서는 ‘국가우선이론’을 만들고 간 것이다.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혼자서 의분에 찬 애국 활동이었다.

이날 실록은 또 수양이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을 효수하자 “길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들은 김연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고 기록했다. 있는 그대로 적는 것으로 정평이 난 사관들이 봐도 국가가 위태로웠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최근의 국내정치에서 원리를 앞세우는 ‘원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유학원리를 앞세워 국가의 이익보다는 그룹의 세력과 이익을 더 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연산군의 퇴출이었다. 갑자사화로 선비들이 화를 입자 신료들은 일치단결했다. 우선 훈민정음을 아는 사람들의 수를 줄일 필요성이 커졌다. 사화(士禍)에서 살아난 그룹은 연산을 부추겨 언문과 관련된 서적을 불태우게 했다. 왕권이 강해졌다.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은 제거되었다. 이를 기화로 신료그룹은 왕권강화가 유학의 이론에 반대한다는 원리주의를 내세워 연산을 내쫓는 기회로 삼았다.

왕권이 유학자들에게 눌리다

조선 건국이후 신료그룹이 왕권을 누르는 최초의 사건이다. 태종이 그렇게 걱정하던 일이었다. 단종 시절에 일어 날 수도 있었다. 이 일을 양녕과 세조가 막았다. 피를 흘려가면서도 왕권 우위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세조의 아들 때부터 원리주의자들의 거세고 지속적인 반발로 형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18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건 강화책을 시행했다. 그러다가 13개 월 만에 급서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제거되었다’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세조보다 왕권을 더 강화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어 등극한 성종도 12살에 왕위에 올라 섭정 기간을 거쳤다.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적었던 인물이 왕위에 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익을 취하는 그룹이 있게 마련이었다. 왕권의 일부를 신료그룹이 가져가는 조건이었다. 성종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왕의 자리와 신료그룹의 이익이 교환되었다. 성종은 23년(1492) 8월18일 신료그룹이 제안한 것처럼 인사를 한다면 “임금이 손발을 놀릴 수가 없게 된다.”고 말한다. 초기에는 왕권의 일부를 신료들이 가져갔지만 통치에 눈을 뜨니 그 권한이 왕을 옥죈다는 것을 알아챘다. 왕이 신료들과 겨루는 형세가 된 것이다.

성종은 원리를 앞세운 신료들의 온갖 모함과 상소로 본부인과 후처를 폐위시켰고, 후처는 끝내 사약을 내려 목숨을 끊었다. 왕 스스로가 권위를 지키기에 벅찬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자가 아닌 장자(연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연산은 신료그룹과 대결했다. 사화를 일으켜 신료그룹에 치우쳐가던 왕권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힘에 부친 연산이 결국 신료그룹에 의해 쫓겨나면서 신료들의 권한이 왕권을 능가하는 태세가 되었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조선은 태종의 마스터플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종이 실천 강령으로 만든 조선 독립의 꿈

조선의 불운이었다. 이런 형세가 후세까지 이어졌다. 적진에 갔다 온 신료그룹이 패거리 이익을 위해 적정분석을 그릇되게 했고, 판단자료를 모호하게 올렸다.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신료그룹은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후대에라도 책임을 물어야하는 순간에 미군정이 그들을 비호하고 나섰다. 일제시대 백성을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힌 그룹인 순사와 오장 등 하급직은 물론 상위그룹의 친일파들도 돌봐줄 후원 세력이 다시 생겨난 것이다.

문학 평론가 김우종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등 뒤에서 미군 지프차 하나가 경적을 울리며 ‘야, 우종아 타’ 그러더라고요. 한국 사람은 그런 차를 못 탈 때였죠. 돌아보니까 쫓겨났던 선생들이었어요. (그들은)미 육군사령부군정청 교육분야 고위간부가 돼 있었어요. (친일파로 쫓겨났던)교사들이 거꾸로 학교교사들을 모두 앉혀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가더라구요.”

경향신문은 해방을 맞을 당시 김 씨가 개성송도 중학교 2학년이라고 보도했다. 그가 본 것은 해방과 동시에 학교에서 대표적 친일파로 여겨지던 교사 5명의 퇴출이었다. 그런데 1년 뒤 그들이 돌아 온 것이다. 일제시대보다 더한 기세로 등장하던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군정청은 행정 경험을 가진 이들이 그들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하곤 했다. 해방과 국가 수립을 도운 것은 정말 고맙다. 하지만 일본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일본이 지금도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는 주장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노태우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을 흔들어 대는 세력들이 대통령의 권한을 무능력하게 만들었다. 독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던 국가원수들의 활동을 옥죈 것을 말할 뿐이다.

태종의 조선 마스터플랜을 숨죽여 지켜본 세종. 세종은 아버지의 뜻에 부응하는 작업으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인데 여기에 마스터플랜의 기본 정신을 숨겼다. 조선 1000년의 독립 사상이었다.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처럼 여기며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것이 곧 민주’라고 말한 자칭 젊은 그룹의 미래 활동을 지켜보고자 한다.

조선이 완전 독립되어 역사에 길이 보전되기를 훈민정음에 담았다. 세종의 원대한 1000년 꿈이 지금 다시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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