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만든 최초의 창작 작품 세종은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책자 훈민정음을 완성해 가는 가운데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을 포함한 6대에 걸친 개국 찬양 노래를 만들게 했다. 125곡으로 된 용비어천가이다. 세종이 문자는 직접 만들었지만 실제 사용례는 집현전에서 만들게 한 것이었다. 공을 집현전 학사들과 나누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학문을 연구하는 전문기관인 집현전에 맡겨서 보다 빨리 또 널리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만들어 세종에게 올리며, 간단히 보고한다며 적은 내용이다.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撰述)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 노랫말)에 폄이 마땅하다”면서 “거친 글을 편찬하와 임금께서 보시라고 올립니다.”하고 적었다. 조선 개국이 무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비난을 누그러뜨리고 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들의 약점을 미화하는 내용이다. 잘못을 감추어달라는 뜻도 담겼다. 칼의 힘보다 시와 음악의 부드러움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이때가 세종 27년(1445) 4월 5일로 책자 훈민정음이 반포(세종 28년 9. 29)된 것보다 1년 전이다.
훈민정음으로 창제된 최초의 창작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용비어천가의 각각은 이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각각의 곡을 짓고 10권으로 묶느라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어떤 것은 훨씬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종은 글자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발표되기 1년10개월 전인 24년(1442) 3월1일에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라고 명령했다. 용비어천가를 짓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실록에 처음으로 용비어천가라는 말이 등장한 날이다.
이를 언뜻 보면 사관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록이 편찬되는 것은 왕이 죽고 나서다. 사관들이 사초를 가지고 있다가 임금이 죽고 나서 맞춰보니, 그 일을 위한 것이라고 편찬 때 기록했기 때문에 시간이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용비어천가를 만든 것은 조선의 뿌리가 깊음을 공식으로 천명하는 ‘역사 확립’의 작업이기도 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더욱 긴[長] 것이옵니다.”라며 중국 “주(周)나라는 면과(시경의 다른 말)를 읊조려 그로부터 나온 근본을 미루어 밝혔고, 상(商)나라는 현조(시경의 다른 말)를 노래하여 그 난 바를 미루어 폈다”며 중국의 시경과 우리 용비어천가를 대비시켰다.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시경을 용비어천가와 대비시킴으로써 조선의 문화가 중국에 필적함을 드러냈다. 공자가 사무사(思無邪) 즉 시경에 실린 시는 생각에 간사스럽거나 고약한 마음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고 극찬한 것을 용비어천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세종의 깊은 마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또 ‘조상 없는 자식 없다’고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반드시 선대(先代)의 공을 지음에 힘입었습니다. 오직 우리 본조(本朝)에서는 사공(이 씨 집안의 시조)께서 신라 시대에 비로소 나타나서 여러 대를 서로 이으셨다.”고 이 씨 집안의 뿌리를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미 말한 것처럼 세종이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고 신라시조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목왕(목조)께서 처음 변방에 일어나사 큰 명(命)이 이미 조짐되었으며, 익조(翼祖)와 도조(度祖)가 연이어 경사(慶事)를 쌓으시고, 환조(桓祖)에 미쳐 상서가 발하였나이다. 은혜와 신의(信義)가 본래 진실하오매 사람들의 붙좇는 자가 한두 대(代)만이 아니오며,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났으매 하늘의 돌보심이 거의 몇 백년이옵니다.”라고 조상들의 은덕을 거론한다. 용비어천가 1장에 나타나는 조상들의 업적을 기린 내용이다. 성씨의 조상이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도 목왕까지만 거슬러 올라간 것은 중국이 황제의 나라로 7대를 제사지내는 것에 비추어 우리는 5대를 제사지내는 것에서 기인한다. 세종이 책자 훈민정음 서문에 독립사상을 심는 계기가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어떨까.
지금으로 보면 종묘에 전체 임금을 모시는 것과는 다르게 되었지만,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종묘에 모신 조상도 용비어천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태종이 조선을 세웠다고 밝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천년의 운수(運數)에 응하사, 신성(神聖)한 창[戈]을 휘둘러서 무위(武威)를 떨쳐 오랑캐를 빠르게 소탕하시고, 보록(임금 자리)을 받아 너그럽고 어짐을 펴서 모든 백성을 화목하고 편하게 하셨다.”
세종은 아버지 태조가 나라를 세웠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태종 공정 대왕께서도 영명(英明)하심이 예[古]에 지나시고 용지(勇智)하심은 무리에 뛰어나사, 기미(幾微)를 밝게 보시고 나라를 세우시니, 공이 억만년에 높으시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사직(社稷)을 편히 하시니,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옵니다.” 세종도 태종이 조선을 세운 것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가 고려로부터 왕의 자리는 물려받았지만 실제로 나라를 세운 것은 태종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이다. 태종의 빛나는 업적을 최고로 찬양한 것이다.
이어 조상들을 “위대하신 여러 대(代)의 큰 공은 전성(前聖)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가지런히 하였으매, 이를 형용해 노래하여 내세(來世)와 지금에 밝게 보이옵니다.”하고 높이 추켜세웠다.
용비어천가를 지은 이들은 “공경하여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학문이 오직 한결 같으시고 정밀하시며, 선업(先業)을 잘 잇고 행하시어 도(道)가 흡족하고 정사가 다스려져서 패연(霈然: 비가 흠뻑 내린 모양)히 덕택이 널리 젖었고, 예(禮)가 갖추어지고 악(樂)이 화하여 밝게 문물(文物)이 극히 나타났사오니, 생각하옵건대, 시가(詩歌)를 지음은 이 성하고 태평한 시기에 속하옵니다.”라고 세종을 노래했다. 비가 내려 온 누리가 풍요롭듯, 세종의 은덕이 나라에 널리 퍼져 있음을 비유했다.
이들은 또 “신 등은 조전(雕篆: 자질구레하게 꾸미는 일)의 재주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 문장)의 임무를 더럽히와 삼가 민속(民俗)의 칭송하는 노래를 캐 모았사오니 어찌 조정과 종묘의 악가(樂歌)에 비기오리까.”하고 자신들의 노래는 왕들의 업적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목조(穆祖)의 처음 터전을 마련하실 때로부터 태종의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든 사적(事跡: 일의 흔적)의 기이하고 거룩함을 빠짐없이 찾아 모으고, 또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널리 베풀고 자세히 갖추었다.”고 제작의 원칙을 말한다. 그러면서 “옛 일을 증거로 하고 노래는 국어를 쓰며, 인해 시(詩)를 지어 그 말을 풀이하였습니다.”라며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우리 국어라고 불렀다.
온갖 눈치를 다 살피며 만든 훈민정음을 국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다가올 고난을 예측하지는 못하였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고난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金石)에 새기고 관현(管絃)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들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業)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永世)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 제본)하여 전(箋: 작은 쪽지)을 아뢰옵니다.”고 글을 끝낸다.
용비어천가가 갖는 가치와 위상이 이 글에 다 들어있다. 과거로는 조선의 뿌리가 깊고, 미래로는 조선이 천년을 이어가는 나라이기를 기원하고 빌며 꿈이 실현되기를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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