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파이 아카시 모토지로 러일전쟁(1904~1905) 때 일본의 승전에 혁혁한 기여를 한 일본의 스파이가 있었다. 일본의 주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이었던 육군 대령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다, 그는 러일전쟁(1904~1905) 발발 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 대사관의 무관이란 주재국과의 군사협력을 위해 파견되는 인력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주재국의 군사 상황을 파악해야 하므로 스파이 임무가 함께 부여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아카시는 프랑스어와 러시아를 구사했고, 외모는 다소 촌스러웠지만 주어진 일에 열중하는 성격이어서 스파이로 적격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와 주변 상황 19세기 말엽,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반도와 중국의 만주지역(현재의 요녕, 길림, 흑룡강 등 동북 3개 성과 내몽골 동부)을 서로 탐내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 조선 병탄과 대륙 진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만주 땅과 조선반도를 집요하게 노렸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난 진압을 위해 조선 땅에 들어온 청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동학난을 진압할 힘이 없었던 조선 조정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에 군을 파병함으로써 조선반도와 조선의 앞바다가 전쟁터가 됐던 것이 청일전쟁(1894~1895)이다. 승전국이 된 일본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를 할양받고 2억냥이란 막대한 배상금을 챙기게 되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세 나라의 간섭(삼국간섭)으로 같은해 5월,북경에 인접한 요동반도를 도로 내놓게 된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3국의 위협에 굴복해 요동반도를 도로 내놓게 된 후 일본은 분풀이 대상을 찾다가 조선에서 민왕후(명성황후) 시해라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얼마나 거들먹거리며 조선의 조정을 업신여겼을지는 짐작이 가는 일이다. 고종과 민왕후는 청일전쟁 후 일본이 전쟁으로 빼앗았던 요동반도를 러시아 등의 압력으로 청나라에 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밀착한다. 러시아의 보호를 받아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1895년 10월 민왕후 시해라는 악랄한 분풀이를 했고, 고종은 자신도 자칫 일본의 손에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다가 이듬해인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몰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고종은 죽은 민왕후의 친정 조카 민영환(후일의 민충정공)을 러시아의 새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에 전권공사로 보낸다. 이 때 친서를 보내 새 차르에게 자신을 보호해줄 러시아 병사 1천5백 가량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지만 러시아로부터 답을 얻지 못한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청을 도와준 후에 그 댓가로 청으로부터 치타에서 만주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며, 여순과 대련을 25년간 조차해 부동항 확보에 성공한다. 이를 보고 일본은 그야말로 와신상담(臥薪嘗膽), 러시아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간다. 장차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전력증강에 총력전을 펼쳐 일본의 군사력은 하루가 다르게 강화된다. 그러는 동안 일본과 러시아 두나라는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계속 싱강이를 벌인다. 마침내 두 나라는 1903년 협상테이블에 앉아 위의 문제들을 논의한다. 일본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조선반도의 평양과 원산을 잇는 39도선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나누어 지배하는 안을 제시했다. 오늘날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져있지만,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러일 간에 39도선 분할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같은 러시아의 제안은 일본에 불리한 것이라고 보고 거부한다. 러-일 간의 관계는 점점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아갔다. 이러한 때에 러시아 대사관의 아카시 대령으로부터 온 비밀 전문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될 때까지는 개전을 어떻게든 미루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러시아는 시베리아 왼단열차가 완공되어야 전쟁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있다는 얘기였다. 병력과 장비의 수송을 감안할 때 러시아측의 그러한 판단은 당연한 것이었다. 1891년부터 시작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트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중간지점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어서 1905년 10월에야 전구간이 완공될 예정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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