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19의 공포가 나라를 덮치자 산과 강, 바다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산은 근처에 있으면 크게 우뚝하고, 멀리 있어도 높게 솟아 손짓한다. 강도 여전히 구불구불 그 아름다운 자태로 율동하고 있을터이고, 바다도 언제나처럼 드넓게 펼쳐져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으리라. 비 개자 뒷산 광교산에 올랐다. 서늘한 기운이 바짝 쫄은 영혼을 무던히 맞아주었다. 땅은 질퍽하고, 나목들도 촉촉히 젖어 있었으며, 바위들도 아직 물기를 먹음고 띄엄띄엄 박혀있었다. 이따금 산새들이 적막을 깨며 존재를 알렸다. “모두들 힘들어 하지?” “살아 남겠다는 움츠림이지” “그 작은 미생물도 이기지 못하면서 쯧쯧” “생존은 일정 부분 세균과의 싸움 아닌가?” “이곳에서도 그런 싸움은 치열하다네” “생물들의 사는 방식이니 그렇겠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드는 속앓이에는 연민을 느낀다네” “그리 오염되지 않은 순수와 의연함이 좋아 이리 찾는 게 아닌가” 볼품없는 영혼을 맞아 대화하면서도 산의 언어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맑음의 심연에 흠뻑 취했다. 산을 오르는 길에만 시선이 집중됐고, 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성성했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오르자 숨이 찼다. 잠시 서서 쉬며 아래를 내려다 보니 나무들 사이로 아파트 군이 빽빽하게 운집해 있다. 저렇게 조밀한 데서 어떻게 살고 있나 싶었다. 가쁘게 차오른 숨소리에 도시의 소음까지 묻혀 청정한 산 속에 뿌려지는 듯해서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잦아들었다고 느끼는데 어디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희미한 소살거림이었다. 가만히 귀를 귀울이고 들으니 계곡 쪽에서 올라오는 물소리였다. 그전에는 듣지 못한 가락이어서 반가웠다. 길이 나지 않은 가파른 비탈을 간신히 내려가 도랑을 만났다. 낙엽에 덮여있는 골짜기에 빗물이 모아져 자작이다가 아래로 내려오며 가는 물줄기를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다가 바위로 층이 생기자 아래로 떨어지면서 애기 폭포를 만들며 음폭을 키우고 있었다. 물은 다소 탁했지만 소리는 맑았다. 꾸미지 않은 천연의 음율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들으니 고저장단도 구분이 됐으며, 강약도 섞이어 있고, 나름 그럴 듯한 화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물리학적으로는 소리는 물체가 서로 맞닿으면서 생성되는 음파이다. 물소리도 물이 인력(引力)에 의해 끌어내려지거나 밀려 내려오면서 흙이나 돌, 또는 저희들끼리 부딪히면서 내는 마찰음이다. 마찰은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니 물소리는 물이 아파하는 신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계곡을 징검징검 따라 내려가며 물소리를 계속 들었다. 물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모이고 또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그 신음은 합창하듯 커져서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듣는 감상(感傷)이라고 할까. 아마도 코로나 19를 겪는 저잣거리의 고충이 오버랩되어서일 것이다. 도랑은 묘지들과 아파트군 사이로 내려와 시멘트 벽에 갇혀 좁혀지다가 도로 밑 터널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 아래로 사라진 뒤 컴컴한 도시의 지하를 헤메게 된다. 울며불며 흐르다가 어디에선가는 굴을 벗어나 큰 강에 합류할 것이다.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파하는 물소리는 더욱 처연하지 싶었다. 운길산 아래 북한강변에서 듣는 물소리는 해질녘 사위가 조용해질 무렵에 더욱 일품이다. 물론 한밤중에도 강의 소리는 구슬프게 울리겠지만, 밤에는 시커먼 어둠이 너무 으스스해서 발길이 꺼려진다. 오색찬연한 석양에 왜가리 서너 마리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누는 여울목에는 어김없이 느린 물살이 철석이고, 물오리떼 두둥실 떠있는 너른 강의 가운데서는 빠르게 흐르는 물소리가 낮은 음조의 배경음악처럼 흠잉한다. 더 없이 낭만적인 정취와 화음이지만, 실은 그 또한 강물이 풀섭에 들락거리거나 저희들끼리 뒤채며 부딪는 신음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다 바닷가에 나가 보면 물소리는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건곤에 가득하다. 끈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바위를 세차게 때린 뒤 치솟는 포말, 바닷바람에 밀려서 내달리며 질러대는 파도 소리는 울음이라기보다 아우성이나 포효라고 할 만큼 요란하다. 신음을 넘어 절규이다. 누가 파도 소리를 인간들의 짧은 언어로 노래하려 하는가? 실개천들이 도심의 지하에서 울부짖는 동안 그 위의 세상에서도 인간들이 신음하고 운다. 길 위에서, 상가에서, 빌딩에서, 모임에서, 큰 집회에서 이야기하고, 떠들고, 함성을 내지르는 음성들은 크게 보면 물의 소리와 다르지 않다. 살기 위해 밀리고 부딪히며 뿜어내는 발성이고 몸부림들이다. 즐거워하는 탄성도 찌든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일종의 반사음일 게다. 일찌기 성인들의 설파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계시였다. 문명사회 이래 철학도 현란한 언어와 개념을 발굴해 끊임없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추구했다. 과학은 더 실제적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대상을 정복하려고 부단히 정진했다. 이 모든 노력들은 인간의 삶에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는 상당히 규명해 냈고, 고통 해소에도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바에 가득 넘치든 번뇌와 고통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근본적인 치유와 해결에는 갈 길이 먼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풀지 못할 난제일지 모른다. 물의 행진처럼 ~. 물의 신음 소리는 인간의 한숨 소리였던 것이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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