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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4), 끔찍했던 수용소 생활: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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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4), 끔찍했던 수용소 생활

이정식 작가 | 기사입력 2020/03/27 [13:55]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4), 끔찍했던 수용소 생활

이정식 작가 | 입력 : 2020/03/27 [13:55]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수용소 막사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수용소 막사

끔찍했던 수용소 생활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18542월 도스토옙스키가 수용소에서 나온 직후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유형생활중에는 외부와의 편지 왕래나 글쓰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수용소 시절에 직접 쓴 기록이라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쓴 메모 몇 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는 1854215일 출옥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에는 강제 군 복무지인 세미팔라친스크로 가기까지 한동안 옴스크에 머물렀다. 출옥 일주일 후인 222일 아직 옴스크에 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쓴다. 수용소의 참상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 지난 4년간 강제노역에 끌려 갈 때를 제외하고, 내내 벽 속에서 생활해 왔습니다. 노역은 힘들었어요. 궂은 날, 빗속, 진창 속, 겨울의 견디기 어려운 추위 속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일을 해야 했던 적도 있었지요. 어떤 때는 추가 작업을 4시간이나 한 적도 있었는데, 온도계 수은이 터졌으니 아마 영하 40도가 넘었을 거예요. 한쪽 발은 동상이 났어요.

우리는 목조건물 한 곳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허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을 정도의 쓸모 없는 목조 가옥, 황폐한 낡은 집 한 채를 상상해 보세요. 여름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요.

마루에 썩은 오물이 한 치 이상 쌓여 있습니다. 작은 유리창은 물때로 녹색이 되어, 한낮에도 글을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인데, 겨울에는 거기에 한 치 이상 얼음이 붙어요. 천정에는 비가 새고, 벽에는 잔금 투성이. 그 곳에 우리는 깡통 속의 청어처럼 구겨 넣어져 있었습니다. 난로에 장작을 6개나 넣었는데도 반응도 없고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아요. (실내의 얼음은 거의 녹지 않아요) 그 대신 연기만 자욱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겨울은 이런 상태입니다.

죄수들은 실내에서 속옷을 빨기 때문에,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겨 발 디딜 곳도 없어요.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어떤 사정이 있어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방 입구에는 양동이가 한 개 놓여 있어요. 무엇에 쓰는지 아시겠지요. 밤중에는 역한 냄새에 질식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도 사람인데 돼지 같이 살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라고 죄수들은 말했었죠.

침대라고는 판자 2, 허락된 것은 배게 하나뿐, 발이 나오는 짧은 망토를 이불로 삼아, 밤새 추위에 떠는 형편입니다. 빈대, , 바퀴벌레, 그런 것들은 됫박으로 잴 만큼 많습니다. 겨울 옷에 낡은 모피 외투 두 개를 입어도 따뜻하지 않은데, 거기에 발에 짧은 장화를 신고 시베리아를 걸어 보세요.

식사는 빵과 스프인데, 규정에 의하면 스프에 한 사람당 고기가 150g 들어 가 있어야 하지만, 잘게 잘라서 고기 모양은 보이지도 않아요. 휴일에는 버터가 거의 안 들어 간 죽이고, 사순절에는 절임 채소와 물 뿐입니다. 위가 많이 상해서 몇 번이나 병에 걸렸습니다. 이런 곳에서 돈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만일 제게 돈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지. 일반 죄수들도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막사 안에서 뭔가 작은 장사를 하며 푼돈을 벌고 있습니다. 저는 차를 마시거나, 때로는 제 돈으로 필요한 양의 고기를 사먹으면서 살아 왔던 것입니다. 담배도 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담배라도 안 피면 틀림없이 숨막혀 죽었을 거예요. 그것도 몰래 피웠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어요. 간질발작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번은 아니었어요. 다리에는 아직도 류머티즘 통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몸은 일단 건강합니다. 이렇게 유쾌하지 못한 일들이 널린 곳인데, 읽을 책도 전혀 없습니다. 이따금 책 한 권을 손에 넣어도, 동료들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증오, 감시인들의 횡포, 말다툼, 욕설, 고성 등 쉴 수 없는 소란 속에 흠칫 놀라면서 읽어야 합니다. 혼자 있을래야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런 상태로 4년간, 4년간 말입니다. 가혹한 일이라고도 했지만, 어떠한 말로도 단정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닙니다. 게다가, 무엇인가 잘못을 하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걱정하다가 머리가 멍하진 상태를 생각하시면, 그것이 제 생활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저의 혼, 신념, 정신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구태여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너무 길어지거든요. 너무나도 현실이란 것이 괴로워서 끊임없이 망상으로 도망쳤지만, 이것이 그럭저럭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저는 이전에 생각도 못 했던 소망과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아직 가설에 지나지 않아요. 쓰지 않을래요. 다만 부디 저를 잊지 마시고, 저를 도와 주세요. 책과 돈이 필요합니다. 보내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이은선 번역)

 

출소 직후부터 세미팔라친스크에서의 5년여의 군 생활동안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자신이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출소 후의 군 생활에 대해 편지를 쓰며 종종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1862년에 출판한 유형소 생활의 수기인 죽음 집의 기록에 앞의 편지 속 내용과 같은 수용소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검열을 의식해서 일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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