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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7), 그 성경책을 도난 당하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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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7), 그 성경책을 도난 당하다

이정식 작가 | 기사입력 2020/03/28 [10:57]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17), 그 성경책을 도난 당하다

이정식 작가 | 입력 : 2020/03/28 [10:57]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준 성경과 같은 년도에 나온 성경(옴스크 박물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준 성경과 같은 년도에 나온 성경(옴스크 박물관)

안넨코바

데카브리스트 부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안넨코바는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탄원하여,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가담했다가 국사범이 되어 유형에 처해진 애인 이반 안넨코프를 시베리아 동쪽의 치타까지 찾아간 용감한 프랑스 여인이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1840년에 『펜싱 마스터』라는 제목의 소설로 썼다. 이 스토리는 오페라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안넨코바는 프랑스인으로 처녀적 이름은 폴리나 게블이었다. 폴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모스크바를 거쳐 험난한 우랄 산맥을 지나면서 눈사태, 늑대 등과 마주치며 끝없는 설원을 지나 마침내 시베리아 치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족쇄를 차고 중노동을 하던 안넨코프를 만나 1828년 4월, 치타의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국은 결혼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만 신랑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두 사람은 그 후 유형지인 치타 주의 공장도시 페트롭스키 자보드에서 살다가 이르쿠츠크 주로 이주해 벨스코예와 투린스크 등에서도 거주했다. 그 뒤 1841년부터 10년 이상 토볼스크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살 때 도스토옙스키 등 정치범들을 폰비지나와 함께 만난 것이다. 안넨코프 부부는 1956년, 30년 만에 특사령이 내린 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이주해 살았다. 알렉산드르 뒤마는 『펜싱 마스터』를 낸 후 18년 만인 1858년 니즈니 노브로고드를 방문했을 때에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안넨코프 부부를 만났다. 알렉산드르 뒤마는 그 사실을 그의 기행문 『차르의 러시아에서의 모험』(1850)에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셋집을 개조해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도 폰비지나와 안넨코바의 초상화가 있다. 그중 폰비지나의 초상화는 나이 들어 살이 많이 찐 중년의 모습이다.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나 이르쿠츠크의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에 걸려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수용소에서 그 성경책을 도난 당하다

성경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 때문에 도스토옙스키 관련 박물관에는 어디에나 오래된 당시의 성경책을 비치해 놓고 있다. 물론 어느것도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시절 보던 원본은 아니다. 원본은 모스크바의 국립 레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토볼스크에서 폰비지나로부터 받은 성경책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죽기 직전 아들 페쨔(표도르의 애칭.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다.)에게 주었다.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도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당시 도스토옙스키에게 준 것과 같은 182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된 신약성서가 전시되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서 유형길에 폰비지나 등 데카브리스트 부인들로부터 10루블짜리 지폐가 숨겨진 성경책을 받은 사실을 아래와 같이 자신이 지폐를 성경책 표지 안에 숨겨 갖고 온 것처럼 적었다. 당시는 모든 출판물들이 당국의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제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감옥에 들어올 때 나는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왔다 몰수될 위험 때문에 수중에는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숨겨 두었다. 즉, 감옥에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복음서의 표지에 몇 루블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속에 돈을 붙여 두었던 그 책은 내가 도볼스끄에 있을 때, 감옥에서 10여 년의 형기를 보내며 같은 고통을 당하고,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형제로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시베리아에는 <불행한 사람들>을 형제처럼 보살펴 주고, 마치 친자식인 양 아무런 사심 없이 성스러울 정도로 그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기 일생의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치지 않고 있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 있을 때 성경책을 늘 베개 밑에 보관했다. 그는 그 성경책을 가지고 문맹의 젊은 죄수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수용소에서 성경책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이야기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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