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들이닥친 통증으로 몸과 정신이 거의 황폐화될 지경이었다. 등은 쑤시고, 어깨는 찢어질 것 같아 좌우로 돌릴 수조차 없었으며, 걸을 때 팔뚝은 뽀개지는 듯이 아팠다. 자연히 몸 전체가 정상이 아니어서 생활도 영락없는 자폐증상을 보였다. 아픈 근육을 문지르고 늘여봐도 통증을 지우기에는 어림도 없었고, 파스(plaster)를 붙여봐도, 더운 물과 수건으로 데워봐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생각은 몽롱해졌고, 오로지 아픔의 골짜기로만 끌려들어갔다. 일상의 속절없는 무너짐이었다. 견디다 못해 통증전문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대기실에는 아픔에 찌든 환자들이 수두룩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증세를 설명하자 의사는 대뜸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고질에 걸려들었다니 가슴이 철렁했다. 등과 어깨, 팔뚝이 쑤신다며 의사를 바라보자 의사는 시답잖은 표정으로 X-Ray를 찎자고 촬영요청서를 내밀었다. 목을 집중적으로 촬영하는 기사에게 아픈 부분도 고루 찎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영상에 나타난 결과는 의사의 진단 그대로였다. "여기 경추의 7번에는 디스크 손상이 심하고, 6번과 7번 사이 경추관에도 협착이 보이지요?” “수술해야 됩니까? “인체가 자생력이 강해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면서 근육보강운동을 꾸준히 하면 통증이 자연히 치료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술보다는 내시경으로 시술할 수도 있지만, 우선 치료를 받아보시고 정 안되겠으면 그때 다시 상의하죠.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은 되도록 자제하셔야 됩니다” 참을 수 없이 아픈데 완치의 기약도 없는 약과 물리 치료를 권고하는 의사의 처방은 답답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문가의 소견에 어깃장을 놓을 계제는 아니었다. 의사의 지시를 따라 소정의 치료를 받은 뒤에도 통증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두부 자르듯이 단번에 낫겠느냐고 위로하며 하릴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병원을 나와 축 늘어진 채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자신이 느끼기에도 꼴불견이었다. 온 신경이 아픈 부위로 몰리기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키우던 애완견이 발을 다쳐 쩔룩거리며 신음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의자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자 아린 심리적 자각증세가 고개를 내밀었다. 완연한 자아(自我)의 상실이었다. 시계(視界)의 사물들도 그냥 사물일 뿐이고, 거기에 내포된 의미는 멀리 가물거렸다. 모든 관계의 얼개도 거미줄처럼 가늘어지고, 상념과 사색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물의 세계와 무엇이 다르랴. 컴퓨터와 SNS를 멀리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자몽한 의식 속에서 무자맥질해댔다.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가라는 규제이자 태형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몰두하다보면 통증이 더 심해졌었다. 고도로 발전하는 IT 세상에서 지적인 활동과 사회활동의 위축, 내지는 단절이 뻔하다. 말을 통한 대화 외에는 문자로 통신하고, 기록하며, 소통의 장(場)을 이루는 시대이다. 줄잡아 500여 명과 10여 개의 단체 카톡방, 페이스북, 개별 SNS등으로 하루에도 수 없이 교신하지 않았는가. 글을 쓰거나 받는 일, 펼쳐보고 저장하는 기호(嗜好)도 시들해질 것이다. 생애를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름의 인격체는 급격히 오므라들 것이고, 오지랖도 좁아져 지푸라기 신세로 전락할 지 모른다. 평소에는 의식 저 멀리에 떨어져 가물거렸던 인간관계, 그에 엉겨있는 정의(情誼)의 에토스가 확연하게 다가왔다. 그러려니 하고 지냈던 운명 같은 관계, 친족과 친척, 친구들, 그 관계에 얽힌 사상(事象)과 정(情), 그런 소중함을 더 가까이 당겨오지 못한 후회가 따가웠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나태해서 자신의 일부에게 너무 소원했었다는 뉘우침이 긴 한숨으로 뿜어져 나와 실내에 퍼졌다. 그전에도 몇 번 비슷한 심리를 경험한 바 있다. 군에 입대할 때와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 외에도 몇 차례 생사의 갈림에 노출되었을 때에는 어김없이 밀려왔던 감정의 응어리였다. 불행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안쓰러움이었다. 그 실체없는 악령이 지금 다시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쇠꼬챙이로 심신을 찔러대지 싶은 고역은 석달이나 이어졌다. 길고 고통스런 가시밭길이었다. 마침 코로나바이러스 19의 포비아가 중국과 한국, 이태리 등 유럽을 차례로 초토화 시키고, 미국까지 덮치던 시기였다. 지구촌이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미생물로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이중으로 고약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통증이라는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아 다루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고, 무엇이든 해내던 두 손으로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난공불락의 적진이었다. 그런 어느 날 컴컴한 방에 한 줄기 아우라의 환상이 비쳤다. ‘밀턴은 실명한 지 7년이나 지나서 불후의 실락원을 펴냈고, 베토벤은 32세에 귀머거리가 됐지만 불굴의 의지로 불세출의 악성(樂聖)의 영광을 안았다. 도스도엡스키는 사형 직전에 풀려나 시베리아에 유배돼 4년 동안 중노동을 견딘 뒤 명불허전의 명작들을 남겼고, 헬렌 켈러는 출생 후 19개 월 만에 눈과 귀, 입이 닫혀 버렸어도 87세까지 살면서 빛나는 사회활동으로 인류에게 강렬한 희망을 선사했다. 상이용사들은 수족이 상하고도 생명을 감사하며 살아간다. 한낱 디스크의 고통에 스러지고 말겠느냐?’ 만류하는 아픔을 제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위기를 맞으면 몸과 정신이 각각 따로 전투모드가 된다고 주술을 외우듯 되뇌었다. 가만히, 그리고 부드럽게 컴퓨터를 여니 그리웠던 나, 나의 세계가 반겼고, 자연히 깊이깊이 빠져들어갔다. 밤을 지새우며 새벽녁까지 몰두했음은 자신도 알고도 모를 일이었다. 아픔이 의지를 약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수면은 부족했지만 머리는 개운했다. 인근 공원에 나가 몸도 풀고, 팔 돌리기와 거꾸로 눕기, 철봉 등에 매달리려고 집을 나섰다. 내친 김에 지난달에 서너 번 찾았던 한방병원을 방문해 침도 더 맞아보고, 물리치료도 다시 시작할 참이었다. 이제는 주저없이 내시경 시술도 상의할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나타난 재택근무와 자가격리 등 새로운 문명의 변주를 벗어난 모처럼의 병원행이었다. 코로나 19에 대응하던 정치의 미숙과 불순함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손 치더라도 인류는 기어코 이 형극을 이기내고 전진할 것이라는 확신이 새로웠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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