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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21), 유부녀와의 불같은 사랑: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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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21), 유부녀와의 불같은 사랑

이정식 작가 | 기사입력 2020/03/30 [12:43]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21), 유부녀와의 불같은 사랑

이정식 작가 | 입력 : 2020/03/30 [12:43]
알타이 산맥의 포타닌 빙하
알타이 산맥의 포타닌 빙하

브란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와 가깝게 지냈다. 어느날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병영에서 일과를 마친 도스토옙스키가 집에 먼저 와 있을 때도 많았다. 브란겔 남작은 자연스럽게 도스토옙스키와 유부녀인 마리야 사이의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브란겔 남작은 물심양면으로 도스토옙스키를 돕는다. 결국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첫 결혼에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후일 브란겔은 자신의 회고록에 마리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서른 살이 넘은 여인이었다. 보통 키에 몹시 가냘프고 정열적이며 명랑한 성격의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고, 훌륭한 교양과 탐구하는 태도를 갖추었으며, 친절할 뿐 아니라 유달리 생기발랄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었다.”

브란겔 남작
브란겔 남작

유부녀와의 불같은 사랑

마리야의 아버지는 이민 온 프랑스인의 아들이었다. 아스트라한에서 교사를 했다고도 하고 검역소의 소장으로 근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알렉산드르 이사예프라는 세미팔라틴스크 세관의 하급관리와 결혼했다. 이사예프는 알콜 중독자에 가까웠으며 가정은 빈곤에 시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후일 두고두고 도스토옙스키를 힘들게 한 아들 파벨이 있었다. 파벨은 1846년 생이므로 도스토옙스키가 세미팔라친스크에 왔을 때 8세였다.

그러던 중 18555, 이사예프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동쪽으로 6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쿠즈네츠크는 러시아와 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알타이 산맥 북쪽에 있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엉엉 울었다고 브란겔 남작은 회고했다. 마리야는 체념한 듯 했다고 한다.

브란겔 남작은 이사예프 가족이 쿠즈네츠크로 떠날 때 송별 파티를 주선했다. 실은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를 만나도록 하기 위한 자리였다. 마차는 밤에 출발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브란겔 남작은 이사예프의 가족을 마차로 수 킬로미터나 따라가며 배웅했다. 남작은 술에 취해 잠들어있는 이사예프를 자기의 마차에 태웠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마차에 마리야와 함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이별을 고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둠속에 멀어져 가는 이사예프 가족의 마차를 말없이 쳐다보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리야가 떠난 그날 밤 도스토옙스키는 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후에도 그는 초조하게 파이프 담배만 빨아대고 음식도 잘 먹지 않아 체중도 줄어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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