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무라트는 산책을 하겠다며 경찰서장의 허락을 얻었다. 1852년 4월 25일이었다. 그 산책이란 말을 탄 산책이다. 매번 경찰서장의 허락을 받아야했다. 산책을 나서는 그에게 다섯명의 러시아군 호위가 붙었다. 나자로프라는 젊은 러시아 하사관 한명과 카자크 병사 4명이었다. 누케르 즉 하지 무라트의 호위병을 모두 데리고 가지는 말라는 얘기가 이전에 있었으나 이날은 누케르 다섯을 전부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천천히 말을 몰던 하지 무라트는 2베르스타(약 2km) 쯤 갔을 때 갑자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호위 책임자 나자로프는 하지 무라트가 도망치려는 것이라고 감지하고 그를 뒤쫓아 갔다. 하지 무라트와 거의 나란히 달리게 됐을 때 그는 하지 무라트의 말고삐를 잡아 채기 위해 손을 뻗쳤다. 순간 하지 무라트의 권총이 그의 가슴을 향해 발사됐다. 이 총성을 신호로 하지 무라트의 호위병들은 카자크 병사들을 권총으로 쏘고 칼로 베었다. 카자크 병사 중 한명만 말을 돌려 요새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그후 요새쪽에서 긴급 사태를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요새의 카자크들이 총 출동해 도망자 수색을 시작했다. 사로잡건 시체로건 하지 무라트를 데리고 온 자에게 상금 1천 루블을 준다는 포고도 내려졌다. 달아나던 하지 무라트 등은 날이 어두워지자 숲 속의 덤불로 들어가 밤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 무라트는 당시 카르가노프(1811~1872) 장군의 집에서 머물다 도주한 것인데, 놀란 카르가노프가 100명의 민병과 카자크를 이끌고 추적에 나섰다. 카르가노프는 도망자들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다가 우연히 한 타타르 노인과 마주쳤다. 그 노인에게 말을 탄 여섯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노인은 그들이 덤불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카르가노프는 숲을 포위한 채 하지 무라트를 붙잡기 위해 아침까지 기다렸다. 하지 무라트는 포위 된 것을 알아채고 탄환과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민병대 부대장이 덤불 가까이로 가 ‘항복하라’고 외쳤지만, 하지 무라트 쪽에서는 소총 사격으로 응수했다. 이때부터 양측간에 총격전인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수적으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 무라트도 어깨와 옆구리에 총탄을 맞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달려 오는 적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후 단검을 뽑아 들고 적에게 다가 갔다. 총성이 몇 발 울리고 그는 비틀거리다 고꾸라졌다. 그는 나무를 움켜잡고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졌다. 이 장면을 톨스토이는 이렇게 그렸다. “죽은 줄 알았던 그의 몸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파파하(*카프카스 지역 의 전통 모자)를 쓰지 않은 빡빡 깎은 피투성이 머리를 일으켰고, 그 다음 나무를 움켜잡고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너무나 무서운 그 모습에 달려들던 사람들은 발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며 나무에서 떨어지더니 몸을 곧추 세우고는 마치 베어낸 엉커퀴처럼 앞으로 고꾸라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대목에 또다시 엉겅퀴가 등장한다. 소설은 “잘 쟁기질 된 밭 한복판에서 짓뭉개진 엉겅퀴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죽음이 떠올랐다”며 끝을 맺는다. 이것이 소설 『하지 무라트』의 대체적인 줄거리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엔 엉겅퀴로 하려다가 후에 『하지 무라트』로 바꿨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우는 엉겅퀴의 강인한 생명력을 불굴의 전사 하지 무라트에 비유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하지 무라트를 '죽을지언정 물러서거나 꺾이지 않는 용기의 화신’으로 보았다. 이맘 샤밀과의 갈등으로 이슬람국에서도 살 수 없었고, 가족들이 샤밀에 의해 몰살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투항한 러시아 쪽에서도 있을 수 없었던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하지 무라트의 마지막 선택은 러시아를 탈출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가족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행운이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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