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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톨스토이와 카프카스(8) - 스탈린의 체첸인 강제이주: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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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톨스토이와 카프카스(8) - 스탈린의 체첸인 강제이주

이정식 작가 | 기사입력 2021/01/31 [08:44]

[문화칼럼] 톨스토이와 카프카스(8) - 스탈린의 체첸인 강제이주

이정식 작가 | 입력 : 2021/01/31 [08:44]
스탈린 시절인 1937년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때 열차가 출발했던  라즈돌노예역의 철로  
스탈린 시절인 1937년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때 열차가 출발했던  라즈돌노예역의 철로  

소설 '하지 무라트'에서 톨스토이는 주인공 하지 무라트가 러시아에 투항 후 이슬람국 지도자 샤밀을 제거한 후 체첸의 지배를 꿈꾸는 것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의 꿈은 러시아 진영을 탈출하다가 죽음을 맞음으로써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 무라트의 죽음과 상관없이 러시아군과 샤밀군의 전쟁은 1859년 8월까지 계속됐다. 러시아군에 쫓기던 이맘 샤밀은 부하와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항복을 선택했다.

생포된 샤밀은 처형을 기다렸지만, 니콜라이 1세에 이어 4년전인 1855년 러시아의 새 황제가 된 아들 알렉산드르 2세는 샤밀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샤밀은 모스크바 인근의 칼루가(Kaluga)라는 곳에 10년간 격리되었다가 알렉산드르 2세의 배려로 1869년 아라비아로 성지 순례를 떠날 수 있었다. 샤밀은 성지 순례 중 1871년 메디나에서 숨을 거뒀다.

소설 속에서 이맘 샤밀은 어쩐지 악인의 이미지를 띄고 있다. 그러나 체첸인을 비롯한 북 카프카스인들에게 이맘 샤밀은 카프카스 최고의 전설적 투사로 지금까지 인식 되고 있다.

샤밀의 항복 후 이슬람국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체첸과 다게스탄은 러시아에 편입되어 차르의 통치에 이어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1720년대 러시아 군이 카프카스 지역을 처음 침공한 이래 계속되어온 체첸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의 러시아에 대한 무장 항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그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체첸 등 카프카스 일대는 일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관할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후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진 후 카프카스 지역은 권력의 공백상태를 맞았다가 1921년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체첸은 1924년 자치주로 됐다가 1936년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2년에는 독일군의 일부가 북서 카프카스 지역까지 도달했다. 그 때 체첸-잉구쉬인 중 일부가 독일에 협력했다고 의심한 스탈린은 1944년 체첸-잉구쉬인 50만 명을 중아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 시켰다.

스탈린은 스파이 망상증을 갖고 있었다.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 17만여 명이 19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갑자기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벌판에 버려진 것도 스탈린의 스파이 망상증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겨 일본 스파이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많은 우리 동포가 기차의 화물칸에 실려 강제이주 도중 또는 중앙아시아 도착 후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사망했다.

추방된 체첸-잉구쉬인 50만 명 중에서도 최대 3분의 1가량이 이주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체첸인들은 이같은 추방을 대량학살로 보고 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후르쇼프가 정권을 잡은 후 1957년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덕에 체첸인과 잉구쉬인들은 다시 카프카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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