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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집

이정식 작가 | 기사입력 2021/02/06 [14:43]

[칼럼]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집

이정식 작가 | 입력 : 2021/02/06 [14:43]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집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집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과 관련된 논란이 지난 1월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일이 있다. 광복회에서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와 의논도 없이 최재형상을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추미애 씨에게 수여해 말썽이 됐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 광복회장이 자기 정치를 위해 벌인 경솔한 이벤트였다는 비판이 컷었다.

문득 6년 전인 2015년 7월,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가옥에 갔었던 일이 생각났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110km가량 북쪽에 위치해 있다.

나는 당시 안중근의사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대학생 탐방단의 인솔 단장으로 그곳에 갔었다. 집은 옛 모습 그대로인 듯 보였으나 사람이 살지 않아 뒷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길 옆에서 보이는 집벽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철제 설명문이 붙어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전 러시아 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했던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 때 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이주해 성장했다.

최재형 선생
최재형 선생

그의 출생년도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1920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그해 4월 7일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최재형의 최후를 보도하면서, “최재형은 금년 63세의 노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출생년도는 1860년보다 조금 앞설 수 도 있다고 본다.

최재형은 어린시절 연해주에서 러시아인에게 고용되어 일했는데,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고용주의 배려로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재학 중에는 교장의 사랑을 받아서 경무청 통역관을 했다고 한다.

10대 시절 러시아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번 다녀오는 오는 등 견문을 넓힐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최재형은 25세 때는 수백호를 거느리는 노야라는 벼슬도 하게 되었고, 그후 군 관련 사업 등을 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는 연해주 한인 중 이름난 부자가 되었지만, 많은 재산을 공익을 위해 썼고, 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독립투사들을 돕는 일에 사용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트크를 떠날 때도 권총와 여비 등을 최재형이 뒤에서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재형은 3,1운동 다음 달인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취임은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연해주에는 1918년부터 일본군이 국제간섭군으로 출병을 하고 있었다. 국제간섭군이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적군으로 불리는 혁명세력과 백군으로 불린 제정러시아 잔존 세력과의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에 들어온 외국 군대를 말한다.

말하자면 일본은 백군 지원 세력이었던 것이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우리나라 항일 세력 중 많은 수는 혁명군인 적군에 기울어져 있었다. 일제와 손을 잡은 러시아의 백군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당연히 적대 세력이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연해주의 조선인 항일 세력을 뿌리 뽑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기습해 우리 동포 300명 이상을 학살했다. 일본군은 동시에 우수리스크로 들이 닥쳐 최재형을 비롯해 김이직, 엄주필, 황 카피톤 등을 전격 체포해 총살했다. 이 분들은 일본군에 의해 흔적없이 매장돼 가족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이를 4월 참변이라고 한다.

최재형은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분으로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뻬놓을 수 없는 인물인 최재형의 이름이 광복회가 공연히 일으킨 문제 때문에 다시 널리 거명된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닌 듯 하다. 광복회는 더 이상 최재형상을 주지 않기로 했다, 최재형상은 기존의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정리가 잘 된 것 같다. 페치카 최재형 성생의 애국 애족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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