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 나이 든 마르코폴로 산양 어미 한 마리가 고원 위를 홀로 걷다가 발을 멈춘다. 산양은 네 다리에 힘을 주며 한참을 버티더니 앞발이 꺾이면서 그 자리에 쓰러져 하늘을 보며 숨을 거둔다.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야생동물 최후의 순간을 잘 포착한 TV 다큐멘터리였다. 사람이 그렇게 죽으면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현생에서의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 조용히 하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모든 인간이 희망하는 생의 최후다. 그런데 한창 때인 28세의 청년이 갑자기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대 앞에 섰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혹시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이제 주의 품으로 돌아가니 기쁜 날이라고 생각할까? 또, 만약에 사형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다시 인생을 살게 되면 그는 새로 받은 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인이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1821~1881)다. 공병장교 출신인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첫 작품으로 문학계의 관심을 받은 몇 년 후인 1849년, 한 독서모임에 참여했다가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다. 이 모임에서 차르체제를 비판하는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읽은 죄로 국사범으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스무 명이 넘는 독서모임 참석자들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처형대에 서게 되었다. 동료들은 서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제 2~3분 뒤면 처형이 시작될 상황이었다. “얼마나 살고 싶었던지, 오 주여, 생명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던지, 얼마든지 선하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텐데!”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그의 두 번째 부인 안나에게 그날의 심정을 그렇게 말했다. 총살형이 집행 되기 직전, 갑자기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차르의 전령이 나타났다. 전령은 엄숙한 목소리로 ‘시베리아 유형’으로의 감형을 알리는 은혜로운 차르의 칙서를 낭독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으로 다시 돌아와 독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모진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유형지 시베리아로 가게 됨에도 “내게 선사 된 생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그는 살아 있음에 감사했고 그날 이후 ‘생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삶에 대한 새로운 의지를 다진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소에서 장차 출소 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는 신체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힘든 노동에도 정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노역을 나가 처음에는 벽돌을 25kg 밖에 지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두 배인 48kg까지 운반하게 됐다고 기뻐한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소를 ‘죽음의 집’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저명한 유태계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하는 대답이 문제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는 ‘무엇 때문에’가 가슴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정의한 ‘죽음의 집’에서 강건한 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시베리아에서의 쓰라린 경험은 그후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그의 불후의 명작들을 낳게 해주었다. 그가 유형소에서 관찰한 범죄자들도 후일 여러 형태로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그러나 시련은 시베리아에서 끝나지 않았다. 빚의 형벌도 있었다. 4년간의 유형생활 후 시베리아에서 5년여 강제 군복무까지 마치고 10년 만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몇 년 후, 함께 잡지를 시작한 형이 갑자기 죽으며 남긴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 그는 그 빚을 죽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갚아야 했다. 첫 부인과의 사별, 간질 등의 불행과 질환은 여기서 이야기 할 틈도 없다. 필자의 졸저 ‘러시아 문학기행 1,2권(1권: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 2권: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에서 살아나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자취를 찾아 나선 기행문이다. 필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7곳의 박물관을 수년간에 걸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찾아 보았다. 러시아에 6곳 카자흐스탄에 1곳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인생 자체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의 시련과 고난은 어쩌면 위대한 문호를 만들기 위해 신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런 선물을 못 받으셨다고 섭섭해하지는 마시기를 바란다. (* 이 칼럼은 광화문 문화포럼 2021년 4월호에 실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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