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과 들, 강이나 바다에 나갈 때면 으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속살거림이 등을 떠민다. 계몽주의 시대의 장 자크 루소가 외쳤던 이 선언적 레토릭은 원래 18세기 당시 세상을 옥죄고 있던 권위적인 사회제도와 문화적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성과 자유로움을 찾자는 부르짖음이다. 그 후 300여 년의 역사가 뒤척이면서 정치-사회제도는 괄목하게 시민의 편이 됐고,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실존적 본질도 많이 밝혀지고 존중돼 인간적인 삶이 크게 신장되었음은 분명하다.
인류는 그렇게 되찾은 인간상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또 다른 명제 앞에 서있다. 빠른 도시화와 대중화, 과학기술의 첨단화는 인간성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고, 알고리즘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시대에 기형적으로 변형되는 인간형을 우려하게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이제 새로운 개념으로 옷을 갈아입은 격이다.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자고 친구들 몇이 바닷가에 나갔다. 핸드폰으로 문자와 통화를 거쳐 계획은 진행됐고, 승용차로 출발하니 네이비가 방향과 길을 주도해 주었다. 차량 물결이 빚는 짜증을 견디며 궁평항에 도착해서 바글거리는 인파에 합류했다. 그들과 섞여 그곳의 방식대로 생선을 양껏 섭취했다. 식후에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도록 가설해 놓은 긴 나무 데크를 산책하고 해변의 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셨다.
귀가할 때도 비슷한 행장이었는데, 하나의 티끌 같은 상념의 혈전이 가시지 않고 사고(思考)의 흐름을 거슬렀다. 어디를 가나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작위와 족쇄를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군상이 줄곧 떠오르는 것이었다. 공기 좋고 시야가 시원한 자연의 흥취를 실컷 누리는 듯하면서도 어디에서나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비자연적인 의도와 설계, 설비에서 떨어져서는 조금도 지탱할 수 없다는 ‘편리함 속 속박’이 내내 께름칙했다.
자연의 품에 안긴다고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연 안에 담긴 핵심적 원리와 섭리, 그리고 자연에 임하는 인간의 자세에 깊은 터득이 없다면 그 피상성이 수박 겉핥기나 코끼리 코 만지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낳는 졸탁(卒啄)의 신비, 만물이 공존하는 조화의 메카니즘, 죽음과 삶의 윤회(輪廻), 작은 것들이 어우러져서 거대한 세계가 운영되는 묘(妙)가 자연의 속성이고 원리로 여겨진다. 인간도 크게 보면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자연에서 나와 자연을 숨쉬고 섭취하며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 생명의 원형이며 본태이다.
2 그런 인간들이 안락하고 편리하게 살려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정복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연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무시무시한 위험을 누르지 않으면 인간들은 편안할 수가 없어서 싸움은 시작됐을 것이다. 천재지변이나 맹수들의 공격, 기아, 각종 질병을 극복하는 인류의 지혜는 놀라웠다. 자연을 이기는 방법을 찾던 문명은 내친김에 고도의 산업사회로 발전됐고, 인간은 지구의 게걸스러운 주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끔찍하게 파괴됐고, 훼손되고 있다. 산등성이나 좀 반반한 곳이면 어김없이 주거단지와 상업시설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논과 밭, 공장들이 빈 공간을 그냥 두지 않았다. 숲과 바닷가도 개발 제한 지역과 외진 곳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손길이 점령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일단 개발된 자연 위에서 기술과 기계문명은 인간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첨단기술이 인간생활을 점령하게 됐다. 그렇게 카오스 류의 극단적 문명의 교직 속에서 인간이 돌아가 자연과 일체가 될 공간이 어디에 남아 있겠는가?
자연을 보호하자는 움직임은 다행히 날로 활발해지고 있다.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으로 글로벌녹색성장기구도 발족됐고,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탄소배출을 제한하는 안간힘도 가상하다. 각국의 시민단체들도 나름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시민들의 인식도 점점 넓혀지고 있다. 자연의 훼손을 막는 규제도 강화돼서 계획적으로 보존되는 경관도 매우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국제기구나 국가들의 전략적인 정책과 조치들만으로 자연과 인류의 화해와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자연은 인류의 보루이고 자연 속에서 인류의 기본이 나온다는 인식이 없다면 저변으로부터 솟는 자연 보호는 미미할 것이다.
인간들의 탐욕이 수그러들지 않고 성성하다면, 문명이 인간을 사물의 꼭대기에 올려놓고 계속 변형시키기만 한다면 자연의 파괴를 막고 공존하면서 인간들의 몸과 마음이 자연의 품에 온전히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들은 끝없이 편리해지고 싶고, 지나치게 영리해지고 있어서 교묘하게 자연을 이용하고 차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세를 업고 과학은 하늘 높이 첨단화되고, 인간을 건조하고 고지능의 신인류로 변용시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불행하게도 자연스러움과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인간의 죽음까지도 정복하려 하고 있고 인공지능으로 인간을 대체하려 하며, 우주로도 뻗어 나가는 마당에 자연 타령은 한가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문명과 과학의 끝없는 진화는 인간성의 돌연변이를 가져올 뿐 아니라 인간 자체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고, 종국에는 인류의 운명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3 인간이 만든 인조 인간이 본래의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거나 아예 뒷전으로 밀어내다가 결국 인류의 멸종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공생은 인간들이 자연의 원리의 오묘함과 유구함을 인정하고, 내재해 있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첫걸음이다. 인간들은 자연의 정수 속에서 원대한 가치를 찾고, 자연의 순수함을 배워야 하며, 자연을 배려한다는 자세를 터득해야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며, 그 길이 오히려 인류의 퇴화를 면하고 번성을 찾을 요체이다.
자연의 원리 속에는 지금까지의 문화도, 신의 섭리도, 미래의 비젼도 모두 들어 있다. 자연을 온전히 품으면 자연은 자연히 인류의 편이 될 것이다. 몸과 정신이 성한 한 자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자연의 싱싱함을 즐길 것이며, 순수함을 사색할 것이다. 생활 여건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 어울려 살지는 못하더라도 정신을 집중해서 자연과 소통하며 자연을 배우고 자연의 향기와 철학을 받아 일체감을 공유하려 할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지는 못할 망정 자연에 수렴하는 인간이 되기를 꿈꾸며~.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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