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은 우리 시에 선율을 입힌 것이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 음악이 아름다운 우리 시와 접목되어 만들어진,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중요한 장르다.
가곡은 홍난파의 <봉선화>를 효시로 여긴다. <봉선화>를 효시로 치면 올해 2022년이 가곡 탄생 102년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다. <봉선화>의 멜로디는 홍난파가 1920년에 <애수>라는 제목의 바이올린 곡으로 작곡한 것이다. 여기에 5년 후인 1925년 음악교사이자 성악가인 김형준 선생이 가사를 붙여 가곡이 됐다. 그런데 1922년에 지어진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은 곡과 가사가 함께 지어졌다. 그래서 <동무생각>이 가곡의 효시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음악인들이 홍난파의 <봉선화>를 가곡의 효시로 삼았을까? 그것은 일제 때 <봉선화>가 금지곡이 될 정도로 우리민족에 끼친 영향이 컸고, 우리 현대음악의 초기에 홍난파의 기여가 지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봉선화>가 조선반도는 물론이고, 일본과 만주의 조선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나가자 일제는 노래 3절의 가사,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있나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가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불온한 내용이라하여 금지곡으로 정해 못 부르게 했다.
1945년 해방 후 가곡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고난을 겪는다. 분단고착 후 월북작가의 작품은 사용이 일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가곡 <고향>(정지용 시, 채동선 곡)은 정지용이 6.25 때 월북한 것으로 오해를 받는 바람에 가사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 뒤 같은 멜로디에 박화목 시인에 의해 <망향>이라는 제목의 가사가 붙여졌고, 다시 이은상 시인에 의해 <그리워>라는 제목의 가사가 붙여졌다.
<바위고개>는 작사자 이서향의 월북으로 이흥렬 작사작곡으로, <아! 가을인가>는 작사자 윤복진의 월북으로 나운영 작사작곡으로 작사자가 바뀌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선구자>가 작사자 윤해영의 친일 논란으로 노래비가 깎이는 수난을 겪는다. 그러나 윤해영은 친일 작가가 아니라 저항작가라는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가곡은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지나면서 한창 인기를 누렸는데,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점점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가곡이 왜 침체에 빠지게 됐을까? 혹자는 가곡이 음악의 다른 장르에 비해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 탓이라고도 하고, 또 방송국 등에서 잘 틀어주지 않아서라고도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아서라고도 지적한다.
그런데 근본 원인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정치권과 사회 일각의 친일몰이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김영삼, 김대중 두 지도자가 잇달아 대통령에 당선된 때다. 그 두 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민주화 이슈가 소멸되자 ‘독재타도’ 대신 ‘반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정치적 반대 진영에 대한 친일몰이가 시작된 것이다. 자연히 일제 때 활동했던 문화예술가들이 다시 부각됐다. 더욱이 2000년대에는 민간 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까지 펴냈다.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초기에 활동한 분들은 거의 가곡과 관련이 있는데 대부분 친일 명단에 올랐다. 분위기가 그러하니, 사람들은 그 분들이 작곡한 노래 부르기가 부담이 되고, 방송국에서는 가곡 틀기가 부담이 되고, 음악교과서에서는 역시 같은 이유로 가곡이 서서히 사라졌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가곡을 모르게 되었으니 가곡의 침체는 당연한 결과다. 우리 현대사와 수난을 같이해 온 가곡은 우리 음악의 매우 중요한 장르다. 지금도 많은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가곡을 꾸준히 작곡하고 있고, 여러 곳에서 연주회를 통해 발표하고 있다. 언젠가 가곡이 다시 전 국민적 사랑을 듬뿍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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