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순한 이미지의 상징인 사슴을 요즈음 만나기가 쉽지 않다. 주로 깊은 산속이나 계곡, 고적한 들판에서 서식하지만, 전에는 어쩌다 산등성이에서 저만큼 숨어서 쭈뼛쭈뼛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띄면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시선이 온순하고 날씬한 몸매의 초식동물이라 더 정감을 느꼈다. 눈 덮인 용문산 중턱과 캘리포니아 버뱅크 뒤뜰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봤을 때는 시집간 누이를 저잣거리에서 만난 오라비의 심정이었다. 경계의 눈망울이 애처로운 그 여린 사슴들이 서식처 환경의 열악으로 멀지 않아 희귀종이나 멸종이 될 우려가 높다고 한다.
태국 남서부의 숌부르그 사슴종은 이미 지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사슴의 울음(鹿鳴-먹이를 얻으면 식구를 부르는 소리)은 전설이 되고 말지 모른다. 둥지를 앗기고 떠돌 사슴의 눈빛을 떠올리면 고도의 금속성 문명에 잠식당하고 있는 인류의 입지가 연상된다. 인간들의 좌표도 그만큼 불안해졌다.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몇몇 친구들이 모여 바닷가에 나갔다. 단말기의 문자와 통화로 나들이 일정은 쉽게 잡혔고, 승용차로 출발하니 내비게이션이 방향과 길을 잘도 안내해 주었다. 차량 물결이 안기는 짜증을 견디며 궁평항에 도착했다. 떠들썩한 어물시장에서 활어를 골라 그 곳의 방식대로 싱싱한 먹거리를 포식했다. 바닷가에 가설된 나무 다리 위로 바닷바람을 쐬며 산책도 하고, 해변의 멋진 카페에서 따끈한 차도 마셨다.
장삼이사들을 따라 공기 맑고 풍광이 수려한 자연의 정취를 실컷 누리는 듯했지만 시선은 자꾸 먼 바다 위를 떠다녔다. 사고(思考)의 흐름을 거스르는 눈엣가시에 찔려 해마가 찢긴 구름 조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몸은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작위와 굴레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족쇄를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군상이 우리들이었다. 몸에 소지하거나 걸친 의상들은 모두 화학과 기계 제품들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 도로와 차량, 건물들과 내부장식들, 매장의 계산기와 식탁 위의 조리 기구들, 전기 줄,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항공기까지 모두 금속성 문명의 이기이거나 공산품이지 않은가. 그것들에 기대야 운신이 순조롭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의도된 설계, 가공된 설비에서 떨어져서는 조금도 지탱하기 힘들다.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일터에서나 우리네 삶 자체가 속속들이 그 모양이지 않은가.
산이나 들, 또는 강가나 바다에 나갈 때면 으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속살거림이 등을 떠민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장 자크 루소가 외쳤던 그 고색창연한 주창, 세상을 옥죄고 있던 권위적인 제도와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성과 자유로움을 찾자는 부르짖음이 새롭다. 루소 이후 300여 년의 역사가 뒤척이면서 정치-사회 제도는 시민의 편으로 다가왔고, 인문과 사회,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본질도 많이 밝혀지고 존중되어서 현대인의 삶이 인간다운 방향으로 신장되었음은 분명하다. 인류는 지금 그 인성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또 다른 명제를 안고 벼랑 앞에 서있다. 인간의 본태, 뼈와 살은 여전한데 문화라는 옷이 사람들의 형질을 변형시키고 있다. 빠른 도시화와 대중화, 과학과 기술의 첨단화는 인간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와 생활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고,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인간의 대체품 휴머노이드의 범람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정보를 다루거나 명령을 따르는 금속의 노예가 신인류의 형상이 되고 있어서 들려오는 경종이다.
자연의 품에 안긴다고 곧 자연인은 아니다. 자연 안에 담긴 핵심적 원리에 깊은 터득 없이 술덤벙 물덤벙 헤매면 수박 겉핥기와 무엇이 다를까? 무(無)에서 유(有)를 낳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신비, 서로 다름이 어울리는 교향(交響)의 묘(妙), 죽음과 삶의 윤회(輪廻), 만물이 어우러져 거대한 세계가 운영되는 총화의 원리가 자연의 속성이고 원리 아닌가? 천재지변이나 맹수들의 공격, 기아와 질병을 극복하는 인류의 성취는 지혜로웠고 축적되었다. 문명은 내친김에 고도의 산업사회로 발전됐고, 우주까지 넘보게 진화하면서 지구의 게걸스럽고 위협적인 주인이 되었다. 산기슭이나 반반한 곳이면 어김없이 주거단지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 있고, 논과 밭, 공장들이 빈 공간을 그냥 두지 않았다. 숲과 바닷가도 개발 제한 지역과 외진 곳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손길에 점령되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다. 화학성 독소로 지난 48년 동안 지구의 담수어종은 83%나 줄었고, 중남미 연안에서는 94%의 생물종이 사라졌다고 한다. 인체의 적이 바이러스라면 자연의 적은 인간인 셈이다.
자연을 소재로 생산된 기술과 기계적 물체들, 그것들이 낳은 시스템은 인간을 거꾸로 제재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로봇에서 진화한 모조 인간이 사고력과 감성까지 갖추게 되고, 대량 생산에 이르면 인간의 둥지와 운명은 어디까지 밀릴 지 알 수 없다. 강(强)AI의 출현은 지구촌에서 삼라만상의 근본적인 변주를 몰고오려는 신호이다. MZ세대가 떠밀리고 이제 막 시작된 알파 세대가 베타, 감마, 델타 세대로 이어지면 인류는 이미 현세와 전혀 다른, AI에 융합된 인간형으로 변형될 것이다.
문명은 속성상 뒷걸음질치지도 않을 것이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편리함을 거역할 수도 없다. 그 기계문명의 드센 파고 앞에서 인간의 본질은 흔들리는 판옥선 꼴이다. 불완전하고 세속적이긴 하더라도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휴머니즘은 영화관에서나 만나게 되려나?
집 뒤로 나가 광교 산 자락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맑다 못해 시퍼렇다. 스스로 그러한 어울림의 소리, 자연과 인간들이 빚어내는 은은한 맥놀이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 본다. 산 아래 도시에서 금속성 소음이 올라와 청각을 에워싼다. 무지근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하다. 동쪽 하늘에는 흰 구름 한 갈기가 명필의 일필휘지이듯 멋들어지게 떠있다. 둥지를 잃고 떠도는 사슴의 형상일까, 사슴과 같은 처지를 우려하는 인류의 눈빛일까?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