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넷이 모이면
1961년 5월 16일 새벽 탱크를 몰고 한강다리를 건너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은 63년 군복을 갈아입고 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18년 장기집권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합니다. 하지만 2인자였던 JP 김종필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초대 부장에 취임해 당내 주도권을 잡는듯 했지만 공화당 창당자금의혹사건, 대일청구권협상 메모사건에 발목을 잡혀 좌초위기를 맞으며 두 차례의 외유를 떠나게 됩니다. 이때 그가 비행기에 오르면서 남긴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이라는 독백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JP의 험난했던 정치역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구(名句)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출국은 온전히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외유이지 그는 반대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해외로 몸을 피해야 했던 것입니다. 64년 연말 2차 외유에서 돌아 온 JP는 남대문로 한 빌딩에서 열린 한국청년회의소 주최 강연회에서 울분을 토해냅니다. "나는 한밤 중 차를 몰고 프랑스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왜, 넷이 모이면 둘씩 편을 가르고 셋이 되면 둘이 한 사람을 바보 만들고 둘이 만나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워야 합니까?" 그의 독특한 쉰 음색의 열변은 장내를 가득 메운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쏟아 내게 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 당시 JP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겪고있는 반대파들과의 갈등을 우회적으로 토로(吐露)했던 것입니다. 그는 뒤에 펴낸 자서전 'JP칼럼'에서도 국민성의 일단을 언급 했습니다. 갈등(葛藤)이라는 한자의 본뜻은 '칡과 등나무'라는 의미입니다. 칡 갈(葛)자에 등나무 등(藤)자가 조합돼 갈등이라는 단어가 된 것인데 실제의 뜻은 통상 두 개체의 대립이나 분쟁의 사회 현상으로 쓰이곤 합니다. 20여m 까지 자라는 칡과 등나무 줄기는 톱으로 잘라야 할 만큼 질기고 단단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데 서로 마주 보며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칡은 오른쪽으로 타고 오르고 등나무는 반대로 왼쪽으로만 타고 올라가 결국은 얽히고 섥혀 풀기 어려운 상태로 뒤엉키게 됩니다. 그래서 개체나 집단의 분쟁을 말할 때 ‘갈등’이라고 부르는 재미있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는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종교와 종교, 인종과 인종, 집단과 집단간의 갈등이 일상처럼 빈번하게 발생하고 확대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갈등은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 간에 다른 의견이나 정서로 인해 서로의 이익에 충돌하는 방향으로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종교와 이념, 국가간의 갈등은 선을 넘어서면 전쟁이 되고 지역, 집단의 갈등은 사회혼란을 불러옵니다. 가족간의 작은 갈등이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듯이 갈등은 크든 작든 그 상태를 수습하지 못할 경우 파국을 맞게되는 것이 정석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온갖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크게는 외교갈등에서부터 남북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세대갈등 등 수많은 유형의 갈등이 쉬임없이 분출되고 부딪치며 확대 재생산돼 악화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선 독도 영유권과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한일 외교갈등은 급기야 혐한(嫌韓), 반일(反日)이라는 국민감정대결로 치닫고 있으며 부끄러운 민족분단 70년에도 더욱 살벌해져만 가는 남북갈등, 고착화 되다시피한 동서지역갈등, 점점 노골화되어가는 좌우이념갈등, 더욱 더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있는 빈부갈등, 연례행사가 된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노사갈등,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세대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날이 새고 진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얼마 전 전국경제인협회가 주관한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사회의 갈등수준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7개국중 2번째로 심각하며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충격입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닐진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국론이 갈리고 국민들이 사분오열 되다가는 어떤 예측 못할 상황이 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몸살이 아니라 병도 중병에 걸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악용하고 있다는데 이론이 없습니다. 아니, 그러한 갈등들은 정치권에서 기름을 끼얹어 사회로 확산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당쟁으로 얼룩진 저 조선조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과 신파, 구파, 상도동, 동교동, 청구동, 친이, 친박, 비박, 친노, 비노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많은 파벌과 패거리들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모태(母胎)는 아니었는지 생각헤 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혹자는 갈등현상에 대해 그것을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욕구불만의 탈출구가 돼 발전의 원동력, 에너지가 된다"고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갈등 현상은 그 상태가 도를 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주차문제로 이웃 간에, 층간 소음문제로 아래 윗층 간에 살인을 하고 재산문제로 자식이 부모를, 부부 간에 살인을 하는 이 단말마적인 사회 현상에 무슨 긍정? 무슨 에너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갈등현상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만큼 심각한 수준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뿐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고,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는 독선, 도대체 관용이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이 사회 분위기를 누가 바꿀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이 망국병을 해소해야 합니다. 우선 나라를 이끄는 정치지도자들과 사회지도층이 심각성을 인식하고 갈등의 해소에 나서야 합니다. 국민소득 100달러이던 배고프던 시절, 1950년대도 오늘과 같이 이렇게 갈등하고 대립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궁금합니다. 대선 때 귀가 따갑게 들었던 후보들의 단골공약 '국민대통합'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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