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이르쿠츠크에는 두 곳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이 있다. 하나는 세르게이 발콘스키(1788~1865)가 살던 집이고, 또 하나는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1790~1860)의 집이다. 유형생활 끝무렵에 지어진 저택들인데 규모로 보면 발콘스키의 집이 훨씬 크다. 나는 이번(2014년 2월) 시베리아 방문에서 일행들이 이르쿠츠크의 발콘스키의 집으로 갈 때 따로 떨어져 가이드 한 사람을 앞세우고 인근의 트루베츠코이 집을 찾아갔다. 트루베츠코이의 집에 당시 유형수들의 발에 채웠던 족쇄 등이 전시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재판에서 남편은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 거의 끝장난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야의 아버지 라옙스키 장군은 발콘스키로부터 이혼 동의를 받아왔다. 라옙스키 장군은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곳에는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1800-1854)가 먼저 와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데카브리스트 부인 중에 가장 먼저 시베리아에 온 사람이다. 그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했다. 예카테리나 집안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녀의 집 도서실에는 장서만도 5천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편이 유형을 떠난 뒤 예카테리나는 곧바로 뒤따라갔다. 마리야 집안과 달리 예카테리나의 부모는 그녀의 시베리아행에 반대하지 않았다. 1826년 9월, 수 개월 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그곳에서도 훨씬 더 가야하는 네르친스크의 광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처음 이곳에 도착해 수용소 벽 틈으로 족쇄를 찬 여위고 핼쑥하며 수염이 덥수룩한 채 해진 외투를 입고 있는 공작이었던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실신했다고 한다. 두 부인은 블라고다츠크 은광 근처의 허름한 나무집을 사들여 남편들을 뒷바라지 했다. 얼마나 작고 형편없는 집이었는지, 훗날 예카테리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벽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면 발이 문에 닿았다. 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옹이 틈 얼어붙은 사이로 머리카락이 통나무에 얼어붙었다.” 주민들로부터 칭송 받은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귀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한 부인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음식이며 빨래며, 뻬치카를 때는 일 등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1829년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는 결정이 내려졌다. 3년간 차고 있던 족쇄가 풀렸다. 그렇다고 강제노동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트루베츠코이는 가장 늦게 강제노동형이 풀려 그후에도 10년간 더 노역을 해야 했다. 트루베츠코이는 1839년 말 13년 만에 강제노동형을 마치고, 이르쿠츠크 인근의 부랴트 마을인 아요크로 이주한 후로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금광개발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곳에서도 항상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족과 친척들이 보내 온 약들을 집으로 찾아 온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카테리나를 “명철한 지혜와 선한 가슴이 훌륭하게 하나가 된 무한한 자비의 화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이들에게는 시베리아의 대도시인 이르쿠츠크에서 사는 것이 희망이었다. 뻬쩨르부르그에 계속 청원을 했다. 그 결과 발콘스키 가족에게는 1845년 이르쿠츠크로의 이주 허가가 떨어졌지만,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1854년에 가서야 겨우 이 도시로의 이주허가가 떨어졌다. 허가가 떨어지자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이 도시에 셋집을 얻어 살면서 목조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인 예카테리나는 새 집이 완공되기 전인 1854년 10월 1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새집에 살아보지도 못했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사면을 받기 2년 전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동시베리아 총독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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