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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 사랑에 빠지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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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 사랑에 빠지다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8/07/13 [16:10]

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 사랑에 빠지다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8/07/13 [16:10]
▲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신혼집. 지금은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의 일부다.

옛 통나무집도 박물관의 일부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은 외형적으로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있다. 하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신혼시절 살던 통나무집이고, 하나는 1971년에 지어진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콘크리트 건물 2층과 통나무집 2층이 박물관 전시실이다. 먼저 박물관으로 지어진 건물의 2층전시실을 보고난 후 서재와 응접실, 침실 등이 있는 통나무집 2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방문코스 같았다. 새 건물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일부는 소규모 전시를 위한 대여 공간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통나무집은 박물관 로비에서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통나무집 뒷 부분 일부를 뜯어서 새로 지은 박물관과 연결해 놓았다.

나는 세메이에서의 둘째날인 5월 5일, 한국에서는 어린이날이었던 이날 오전 일찍 박물관엘 다시 갔다. 전날 날이 흐려 제대로 못찍은 박물관 외관도 한번 더 찍고 전시실도 재차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10시 반 경부터 다시 비가 내렸지만 그 이전까지는 비교적 청명했다. 일찍 아침을 먹고 호텔에서 도보로 20여분 만에 박물관에 도착했다. 차을 타고 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박물관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가가며 보니 건물 측면에 커다란 벽화가 보여 처음엔 다른 건물인줄 알았다. 전날 보지 못한 도스토옙스키를 상장하는 펜 등을 드린 대형 그림이다. 다시 가지 않았다면 건물 옆면에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메이를 떠날 뻔했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9시 전에 도착했으므로 먼저 박물관 외곽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구면이 된 이리나 부관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소 세 마리값 월세집

나는 이리나 부관장에게 도스토옙스키 신혼집 월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날 방문 때 이리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세를 살았던 통나무집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집의 주인은 우체부였으며 1층은 주인집에서 쓰고 2층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월세가 은화 8루블이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받는 군인(준위) 봉급 은화 16루블의 절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3루블 정도했으므로 이 집은 꽤 비싼집이었다고 설명했다.

전날 저녁 식사후 호텔로 돌아와 이리나의 설명을 정리하다 보니 통나무집 2층 월세가 거의 소 세 마리 값이이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우리나라 한우는 보통 한 마리에 5~6백만원, 때로는 1천 만원이 넘는 소도 있다. 물론 한국의 최근 한우값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19세기의 시베리아라고 할지라도 소 세 마리값을 월세로 낸다는 것은 준위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는 그 때의 소값은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겠지만, 그래도 당시 이 집은 동네에서 좋은 집에 속했다고 했다.

봉금의 반을 집세로 낸다는 것은 어느 시절에나,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처럼 자기 분수에 비추어 그렇게 비싼 신혼집을 얻었을까? 유형수였던 그가 첫 사랑이요, 첫 부인이 된 마리야 이사예바에게 쏟은 애정과 가슴 졸이던 결혼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형편에 다소 무리가 됐을 그런 집을 얻은 것이 어느 정도 이해도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다소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결혼 전, 형 미하일에게도 돈을 부쳐달라고 했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렸다. 아무튼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죄로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까지 가게 됐고 어떻게 여기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간략히 라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살았던 통나무집에 비치된 앨범. 앨범 속에 브랑겔 남작, 도스토옙스키, 마리야, 도스토옙스키가 카자흐 학자 빌리하노프와 같이 찍은 사진(좌로부터) 등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랑과 눈물, 사형장에서 새 생명을 얻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무거운 족쇄를 찬 채 4년간의 혹독한 유형생활을 마친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 3월, 곧바로 7백 50km 떨어진 세미팔라친스크의 제7시베리아 보병대대에 사병으로 배속되었다. 형벌의 연장이다. 그는 과거 퇴역 육군 소위였다. 1849년 4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소 참석하던 독서모임에서 비평가 벨린스키가 쓴 차르(황제)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낭독한 죄로 체포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수십명이 체포되어 그중 21명이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사형수들은 1849년 12월 22일 총살형이 집행될 세묘노프스키 연병장까지 끌려갔다가 처형 직전 차르의 감형이 발표되면서 형 집행이 중단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 시베리아 유형과 4년 군복무로 감형되었다. 후일 알려졌지만, 사형장에서 발표된 그것이 원래의 선고 내용이었다. 그러나 차르는 젊은 이들에게 인생의 엄한 교훈을 준다는 의미로 잔인한 사형 연극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생명을 되찾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감방으로 되돌아 와서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때 그는 ‘삶은 은총’이라고 느끼며 일시나마 행복감에 젖었던 것이다.

세미팔라친스크에서의 군 생활을 하던 중에 그는 7~8세 된 아들을 가진 마리야 이사예바라는 사랑스런 금발을 가진 유부녀를 알게 된다. 도착 첫 해인 1854년 가을 무렵부터다. 그는 온 정신을 이 여인에게 빼앗겼다. 둘은 몰래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급 세무관리였던 마리야의 남편이 7백km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별의 충격에 좌불안석이었다. 엉엉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가 가족과 떠나던 1855년 5월의 달 밝은 밤, 그는 친하게 지내던 지방검사 브랑겔 남작과 함께 마차로 마을 밖 몇 킬로미터를 따라가며 그들을 배웅했다. 술에 취한 여인의 남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는 전나무 아래서 마차에서 내려 포옹을 하며 안타까운 작별을 고했다. 연인을 실은 마차가 멀리 사라져 갈 때 그는 장승처럼 서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런데 알콜중독자였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가 전근 간지 석달만인 이해 8월 사망한다. 어떤 자료에는 신장병이라고 하고, 어떤 자료에는 폐결핵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가족에게 장례 치룰 돈도 남겨 놓지 못한 채 죽었다. 이별 후에도 여인과 편지 왕래를 하던 도스토엡스키는 이사예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 여인을 돕기 위해 여행중이던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돈을 좀 보내주라고 부탁 한다.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에게 호의적이었던 브랑겔은 그같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인이 미망인이 되었으므로 도스토옙스키는 한편으로는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학교 교사인 베르구노프라는 젊은 경쟁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도스토옙스키는 이사예프가 죽은 후 마리야와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 필자의 책 '시베리아 문학기행'을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기증했다.우측이 이리나 박물관 부관장.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다

인물이 좋았던 마리야에게는 과부가 되자 혼담도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마리야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에게 들어 온 혼담 이야기도 해 도스토옙스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형 미하일과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자신에 대한 황제의 사면이 머지않아 있을 것이란 점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 그녀를 부양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증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마리야에게 자신이 경쟁력이 있는 남편감이라는 것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E. H. 카는 그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에 미쳐있었다고 썼다.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친스크 동북쪽의 바르나울까지 다녀 올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몰래 쿠즈네츠크까지 그녀을 만나러 갔다. 그같은 사실이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는 그럴 각오까지 하고 쿠즈네츠크에서 마리야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틀을 머물고 왔지만 다행히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를 알게 된 후 결혼할 때까지 3년 동안 글쓰기도 거의 포기할 정도로 마리야에게 몰두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856년 10월 준위로 승진한 것이다. 처음에 사병으로 세미팔라친스크로 왔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 정치범에 대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1855년 11월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승진했고, 한 해 후 장교대우인 준위로 올라가 결혼을 위한 경쟁력을 더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저울질 하던 마리야도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2월 쿠즈네츠크로 가서 정교회 예배당에서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신랑이 1월에 마련해 놓은 세미팔라친스크의 신혼집으로 돌아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부부는 이 집에서 2년 반쯤 살았다. 그 뒤 모스크바 위의 트베리에 몇 달 머물다 1859년 말 떠난지 10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게 한 이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야가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시절에는 세미팔라친스크의 그 통나무집에서 네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파트였다. 1960년대에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이 목조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었다. 지붕을 뜯어낸 상태에서 지역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역사적 장소인 이 집을 보존해야한다고 당국에 청원해 철거를 중단했다고 한다.

그 뒤 1971년 이 목조건물에 연결하여 콘크리트로 지어진 2층 규모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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