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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설도에 비견할 한국의 황진이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4/10 [20:01]

중국의 설도에 비견할 한국의 황진이

이정식 | 입력 : 2014/04/10 [20:01]

설도기념관에는 석상이 안팎에 두개 

설도(薛濤, 768?-832?)는 앞서 '문학기행'의 '가곡 <동심초>'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우리가곡 <동심초>의 원작자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망강루공원내 설도기념관 옆에 있는 설도상. 설도가 좋아했던 대나무 숲을 거니는 모습이다.

<동심초>의 가사는 설도의 오언절구 한시인 춘망사(春望詞)의 제3수를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시에 김성태 선생이 1946년에 아름다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
설도는 중국 당나라 때의 여류시인으로 1200년 전 사람이다. 그녀가 살던 중국 사천성 성도의 망강루공원 안에는 ‘설도기념관’이 있으며 설도 석상도 기념관 안팎에 두 종류나 서 있다. 후세 사람들이 시인으로서 그녀가 남긴 문화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공들여 세운 것이다.
설도의 이력에 대해서는 1930년대에 <동심초>를 최초로 번역, 발표한 김억 시인(김소월의 스승)이 그의 한시번역시집 <옥잠화>(1949)에 간략히 소개한 것이 참고가 되겠다.
“설도는 당조인(唐朝人, 당나라 사람). 자(字)는 홍도(洪度).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의 양육을 받다가 기생(妓生)이 되어 명사(名士) 주연에서 시(詩)를 지어 재자(才子)의 이름이 높은 분(시를 짓는 재주로 이름이 높았다는 뜻). 75세 향수(享壽). 시가집으로는 설도집(薛濤集) 한 권”
이처럼 설도는 기생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역사적 여류시인으로 대접을 잘 받고 있다.

황진이는 설도가 부러울 것

▲ 개성의 박연폭포 (사진=이정식)

그러면, 설도에 비견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여류시인은 누구일까?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던 황진이(黃眞伊, 1500년대 초반, 생몰년 미상) 아닐까? 황진이는 미모와 시재가 뛰어난 기생이었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매우 잘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선녀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설도의 <동심초>처럼 꽤 알려진 황진이의 시를 가사로 한 우리 가곡이 있으니 <꿈>이다. 이 역시 김억 선생의 번역시(황진이의 한시를 번역한 것)를 가사로 하여 김성태 선생이 1950년에 작곡했다.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이 노래의 멜로디를 대개 기억한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 같이 떠나 노중(路中)에서 만나를 지고”

떠나간 님을 행여 꿈 속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긴 애절한 시다. ‘꿈길을 동시에 떠나 그 길에서 꼭 만나자’는 내용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사진, 동영상은 물론이고 화상통화까지 가능한 시대이니 꿈을 고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옛날에야 떠나고 나면 그만, 꿈 속에서라도 한 번 보면 큰 행운이다.
황진이는 자유분방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남자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명기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자 뭇 남성들이 그녀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설령 거금을 들고 나타나는 이가 있어도 풍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황진이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시도 여러 편 남아있고 젊은 날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전해오지만 그 후의 삶,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광복 전에는 개성 동문 밖에 그녀의 무덤이 있었다는데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황진이는 설도가 부럽겠다. 황진이도 대접을 좀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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