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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남이 쓴 <선구자> 작곡의 전말

가곡 <선구자>의 진실 (2)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4/14 [21:47]

조두남이 쓴 <선구자> 작곡의 전말

가곡 <선구자>의 진실 (2)

이정식 | 입력 : 2014/04/14 [21:47]

7세 때 미국인 선교사에게 작곡 배워

▲ 소프라노 이규도씨 내외와 조두남 선생(가운데)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배가 시작된지 2년 후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7세 때 미국인 캐논스(J. Cannons) 신부에게 작곡을 배워 11세 되던 해인 1923년 가곡 <옛 이야기>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8세 때 부친을 잃은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무작정 집을 나가 만주로 가 고향집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봉천과 하얼빈 등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가 <선구자>(최초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의 작가 윤해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인 1932년. 목단강 주변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을 때였다. 강변을 거닐다 동네 어귀에서 여인숙 주인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형사같은 사람이 찾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반가워 할 일이 아니었다.
조두남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82년 와병 중에 펴낸 제2 수상집 <그리움>에서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을 만난 일을 ‘윤해영과의 상봉’이란 소제목 아래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윤해영과의 상봉

그 시절 만주에서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는다는 것은 반갑기 보다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만주에서는 당시 이웃사람 끼리 서로 만나서도 서로의 과거를 알려고 들지도 말하려 들지도 않았다.
방에서 기다리는 낯선 객이 일본인 형사같더라는 말에 적이 두려운 심정으로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조그마한 키의 깡마른 체구에 낡은 외투를 걸친 초췌한 차림의 젊은이였다. 그는 귀에 익은 함경도 사투리로 자기는 윤해영이라는 사람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보다 서너살 위로 보이는 윤씨의 눈빛은 침착하고 강력했으며 깊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어서 아무리 보아도 장사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조선생이 작곡을 하신다는 말씀은 벌써부터 들어 왔습니다만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다 보니 이제야 찾게 되었습니다. 조선생께 부탁드릴 것은 이곳에 흘러 들어와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연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해대는 그는 고생으로 시달린 풍상의 흔적과 병색이 완연했지만 예리하게 번득이는 그의 눈엔 뭔가 새로운 저항과 저력이 있는 듯 했다.
윤해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내 앞에다 내 놓았다. 거기에는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로 시작되는 세절의 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윤씨로부터 내가 말로만 들었을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북간도 용정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 까지 뻗쳐 들어온 일본 경찰의 세력과 본토박이 중국 사람의 노골적 적대감, 그 속에서 고생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 또 용정을 배경으로 벌이는 독립군들의 용감한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면서 나는 독립투사들이 오고 가며 거친 발걸음을 잠시 쉬는 일송정 용정 고개를 쉽게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는 해란강 물줄기도 또 용주사 종소리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윤해영은 그가 내민 가사에 곡을 붙여주면 달포쯤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와 노래를 배워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바람처럼 떠나갔다.
바쁜 걸음으로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약한 듯한 그의 몸이 만주 벌판의 거센 바람을 이겨낼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 달라며 떠나간 윤해영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후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윤해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그는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 조두남 제2수상집 <그리움> (1982)

당시 항일전선에 몸바쳐 나선 혁명 동지들은 서로의 정체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여려 번 바꾸고 때로 적의 음모로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낌새가 보일 때면 어디론가 사라져 숨어 살기 때문에 절친했던 동지끼리라도 연락이 끊어지기 일쑤고 심지어는 동지 중 누가 죽는다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윤해영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목단강변의 석양 사이로 불쑥 나타났듯 꼭 그렇게 그가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나는 유해영에 대해 이름 석자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조국이 해방된 그 기쁨을 송두리째 그에게 또 그처럼 조국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 투사들에게 바쳤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자칫하면 내 나라 내 민족을 잊어 버리기 쉬운 동포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 주려던 갸륵한 윤해영은 그토록 바랬던 해방이 된 지금 어느 차가운 땅속에서 이 기쁨을 누릴까? 낮에는 어두운 숲속 둥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논 밭 가까이에 나와 들쥐를 잡아먹는 접동새 마냥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밤에만 외진 길을 걸어야 했던 서러운 우리 독립투사들! 그 넋이 피어서인지 <용정의 노래>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불리어졌다.
해방을 맞고 나서 나는 과거의 한이 담긴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 대신에 윤해영처럼 높푸른 기상을 지닌 독립투사들을 일컫는 <선구자>로 제목을 바꾸어 달았다.
또 유랑민의 서러운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2∙3절의 가사에서도 “눈물 젖는 보따리”나 “흘러 흘러 온 신세” 같은 구절을 빼버리고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을 넣고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는 일절의 것을 그대로 후렴으로 반복시켰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해방을 맞아 새로운 희망과 환희에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만주 벌판에서의 쓰라린 유랑 생활의 한이 배어있는 지난날의 가사를 그대로 부르게 하는 것보다는 조국 광복을 위해 고생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내용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해영이 살아 있더라면 나는 꼭 그에게 새로운 가사를 지어달라고 졸랐을 터이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윤씨가 나에게 시를 건네주면서, 좀 더 강렬한 내용을 담고 싶었지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토대로 가사의 2∙3절 가운데 일부를 내가 뜯어 고쳤다.
해방이 되자 <선구자>는 많이들 불리어 왔으나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됐던 ‘63송년음악회’ 때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반주로 지금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였던 바라톤 김학근씨가 부른 것을 그때 기독교 중앙방송국 음악과장이었던 최성진씨가 그 연주를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 곡을 <정든 우리 가곡>이란 프로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동안을 매일 방송함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곡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으나 소절 소절마다 정열을 기울여 정확하게 불러야 작곡자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두남 제2수상집 <그리움> 41~43쪽, 세광출판사, 1982)

이같은 조두남의 회고에 따르면 <선구자>의 원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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