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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최순애 부부의 삶과 사랑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4)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4/23 [09:17]

이원수-최순애 부부의 삶과 사랑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4)

이정식 | 입력 : 2014/04/23 [09:17]
▲ 이원수 흉상쪽에서 본 이원수 문학관 내부

6.25  때는 두 자녀 잃고 노무자 생활하기도

이원수는 8·15광복 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6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도 가입했으며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이 되어 이해에 문학집《종달새》, 1948년에는 그림동화집 《봄잔치》를 펴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난리통에 이원수는 자녀 둘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자신이 겪은 이 비극을 그는 동화 <꼬마 옥이>에 담았다. 전쟁 기간중 이원수는 영국군을 지원하는 노무자가 되어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한 일도 있다.
종전 후 1954년 그는 한국아동문학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을 지냈고 1956년에는 《어린이 세계》라는 아동 월간지를 창간해 주간을 지냈다. 1962년에는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출간했고, 1965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회갑을 맞은 1971년에는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간행했으며 이해에 한국아동문학가 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는 67세 때인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이해 예술원상 수상 축하 동시·동화집 <이원수 할아버지와 더불어>를 출간했다. 1980년 문화의 날에는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문학 부분 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유해는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82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창원에 <이원수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사후 22년 뒤인 2003년 12월의 일이다.

이원수는 원래부터 부유한 집 태생이 아닌데다, 결혼 이후의 삶도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히 생활은 늘 쪼들릴 수 밖에 없었다. 이원수가 쓴 ‘나의 아내’라는 글을 읽으면 가난한 선비집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나의 아내

약한 몸으로 경난(經難, 경제적 어려움) 속에 살아온 내 아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옳은지 잘 모르겠다,
처 최순애의 어릴 적 작품, 동요 <오빠생각>과 내 동요 <고향의 봄>이 인연이 되어 오랫동안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결혼을 의논하게 되자 내가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서 꼭 1년동안 아내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기다려 주었었다.
내가 스물여섯, 처가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실직의 가난 속에서 아내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해방되자 시골에서 올라왔으나 역시 온갖 경난(經難)은 약한 그에게 너무나 과중하게 계속되었다.
아내가 어려운 살림을 이날 이때까지 해 오고 있는 것은 경제적 힘이 너무나 없는 남편 때문이지만, 그래도 그걸 견디어내는 힘은, 내 직업을 보지 않고 이해해 주는 데에서 생겼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의 고집과 자존심을 누구보다도 알아주고 탓하지 않는 데서 아내는 경난(經難) 속의 일생을 능히 살아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내는 나처럼 늙어도 철이 없는 데가 있어, 때로는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 또 위해 주고 염려해 준다. 싫을 때는 말로 하고, 좋을 때는 말 아닌 마음으로만 한다.
그러나 아내의 가장 사랑스런 모습은 내게서나 아이들에게 퇴박을 맞고 어리둥절할 때다. 그럴 때 내 마음에는 사랑의 불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어느덧 아내도 회갑을 지냈다. 이제는 그와 같이 살아온 과거가 슬펐거나 즐거웠거나 모두가 귀중한 세월이었다는 생각 밖에 없다. 좀 편안히 살게 해 주고 싶건만 그러지 못해 걱정이다. (이글도 이원수 문학관의 한쪽 벽 최순애 여사의 유품들 위에 확대되어 붙여져 있다. 아래 사진)

▲ <나의 아내>라는 제목의 이원수의 글과 부부의 사진 (이원수문학관)

이원수가 아내에 대한 그러한 걱정을 덜고 저 세상으로 갔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어려웠던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부부의 삶과 사랑이 대체로 이러하지 않았을까. 짠-한 공감을 던져주는 글이다. 최순애 여사는 1998년 6월 28일 84세로 남편 곁으로 갔다.

그래도 의미있는 이원수문학관

필자는 2014년 4월 12일 마산음악관과 마산문학관을 둘러본 후 창원의 이원수 문학관을 찾아갔다. 이원수 문학관은 고향의 봄 도서관 1층에 있었다. 도서관은 언덕 위에 있어서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조금 가팔랐으나 입구에서부터 분홍색의 아름다운 철쭉 꽃 등이 활짝피어 흐린 날씨에도 밝은 느낌을 주었다.
이원수문학관에 들어서니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산쪽과는 느낌이 크게 달랐다. 이원수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흉상도 있었으며, 사진도 많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친일시와 이에 대한 평가도 한쪽 벽면에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게시되어있었다. 전 생애의 공과(功過)를 분명하게 전시해 놓은 것이다. 마산음악관이나 마산문학관과 뚜렷이 비교가 되었다.

마산쪽의 음악관과 문학관은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아서인지 개개인의 사진도 작고 옹색하게 붙어있을 뿐이다. 음악관의 인물 소개는 더욱 부실하여 조두남 외에는 생몰년도 안 적혀있어 어느 분이 돌아가신 분인지 살아계신 분인지 알 수 가 없다. 이래서야 둘러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 개개인의 자료를 충분히 챙겨 넣을 수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인물사진이라도 큼직하게 잘 제작해 걸어 놓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마산음악관과 마산문학관은 당초 작곡가 조두남을 위한 ‘조두남기념관’과 시인 이은상을 위한 ‘노산기념관’으로 각각 지어지다가 ‘친일’ ‘독재부역’ 등을 이유로 시민단체 등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이름과 내용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인물들을 함께 집어넣었는데, 이 지역 출신 음악인, 문학인이 누구누구인지 한번에 알 수 있는 장점은 있겠으나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 전시내용으로는 개개인의 작품이나 업적을 제대로 알기 어려워 구색 맞추기 전시관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 벌교에 있는 커다란 채동선음악관이나 조정래문학관에 비하면 마산쪽은 너무나 형식적이고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지역의 문화 예술인을 알리는 의미있는 ‘홍보 및 자료관’으로서의 제구실을 하려면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할 듯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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