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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5)

마외파를 지날 때 군신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5/14 [08:45]

'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5)

마외파를 지날 때 군신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5/14 [08:45]
▲ 양귀비꽃

천보 14년(755년) 안록산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간신 양국충을 친다는 명분이었다.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을 치라는 황제의 밀지를 받았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 후 해(奚)와 계단(契丹)의 병사 15만명을 이끌고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를 출발하여 남하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라가 태평하여 군기가 문란해지고 병사들은 안일과 나약에 젖어 있었으므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낙양이 함락되고 수도 장안마저 함락위기에 몰리자 현종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장안을 떠난 이튿날 친위군사들이 양씨 일족을 타도하기 위해 ‘난중의 난’을 일으킴에 따라 현종은 무력한 상태에서 양귀비가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력을 잃은 후 아들에게 살해당한 안록산

장안을 점령한 안록산은 낙양에서 즉위식을 올리고는 대연(大燕)황제라 일컬었다. 장안의 궁성에 있던 재화를 옮기고 주야로 주연을 일삼았으나 반란중 생긴 눈병이 차츰 악화되어 마침내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애첩 단(段)씨의 아들 경은(慶恩)을 사랑하여 자리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 경서(慶緖)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난을 일으킨지 불과 2년만인 757년의 일이다. 이때 안록산의 나이는 오십여세였다. 경서는 아비를 죽이고 대연황제의 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신하 사사명(史思明)에게 피살되었다. 이어 사사명이 대연황제가 되었지만 그도 장자인 사조의(史朝義)의 손에 죽었다.
양귀비를 마외파에 묻은채 촉으로 도망쳤던 현종은 그해 천보 15년(756년) 태자 형(亨)에게 황위를 넘겨 그가 당의 7대 숙종(肅宗) 황제가 되었다. 현종의 재위기간은 44년(712-756년)이었다.
숙종은 황위에 오른 후 이민족인 위구르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2년만인 757년 장안을 회복했다. 장안은 새 황제 숙종과 태상황이 된 현종을 환영했다. 숙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숙종 다음 대종(代宗) 때인 763년 사조의가 부하에게 피살 된 후 당은 안록산의 난이 시작된지 8년만에 비로소 낙양까지 수습하여 전국을 다시 평정하게 되었다.
[주: 여기서 위구르인은 당시 몽골 고원에 제국을 세웠던 위구르인을 말함. 안사의 난 때 위구르는 토번(티벳)과 함께 당이 난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위구르족은 현재 중국 서쪽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 양귀비꽃을 찾아온 벌 한마리

현종의 쓸쓸한 말년

한편, 장안이 회복되어 태상황이 된 현종이 피난지였던 촉(지금의 사천성 지역)의 성도로부터 장안으로 되돌아갈 때 마외파를 지나게 되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잃은 이곳에 이르러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황제라곤 하여도 피난길의 황제는 사랑하는 여인 하나 보호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당시를 생각하고 군신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 양귀비의 묘소는 서안의 교외인 흥평현 마외파에 있다. 현종이 마외파를 지날 때 양귀비의 묘소에 들렀다고도 하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天旋地轉回龍馭    到此躊躇不能去
(천선지전회룡어) (도차주저불능거)
馬嵬坡下泥土中    不見玉顔空死處
(마외파하이토중) (불견옥안공사처)
君臣相顧盡沾衣    東望都門信馬歸
(군신상고진첨의) (동망도문신마귀)

천하의 정세가 바뀌어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주저 주저 가지 못하네
마외파 언덕 아래 흙더미 속
옥같던 (귀비의)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자리만 남아있네
군신이 서로 돌아보며 눈물로 옷을 적시며
동쪽의 도성문 바라보며 말에 몸을 맡긴 채 돌아왔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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