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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르게 알기①】 면암 최익현·임병찬 후손들, “ 드라마가 왜곡, 수정하라” 논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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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르게 알기①】 면암 최익현·임병찬 후손들, “ 드라마가 왜곡, 수정하라” 논란

신수용 대기자 권오주 기자 | 기사입력 2019/08/25 [14:46]

【역사바르게 알기①】 면암 최익현·임병찬 후손들, “ 드라마가 왜곡, 수정하라” 논란

신수용 대기자 권오주 기자 | 입력 : 2019/08/25 [14:46]

구한말부터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국권수탈조약이 체결되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함께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돈헌 임병찬(林炳瓚, 1851. 2. 5~1916. 5. 23) 선생.

임 선생은 각 교과서와 보훈처 사료, 돈헌문집, 항일독립운동사, 인물한국사, 전북의병사, 정읍의병사 등 각종 문헌을 보면 국모인 민비가 왜놈들에게 시해된 뒤,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무성서원에서 자신이 수년간 양성해온 의병조직을 합류시켜 항의를 하였고, 이는 훗날 호남의병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숱한 옥고와 대마도에 유폐되고, 회유와 타협을 요구한 매국노 이완용 등을 모욕하며 거부했다가 거문도에서 순국한 항일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사료에는 임병찬 선생은 전북 옥구군에서 태어나  향시 백일장에 나가 ‘대고풍’(大古風)으로 수석을 차지하고, 15세가 되던 해에 전주부 감시(監試)에 합격하는 등 신동으로 불렸다.

3대에 결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대학독립의군부 총사령관인 임병찬 선생의 후손들이 SBS드라먀에 사실을 왜곡했다며 이의제기와 함께 심의를 요청했다. 사진 왼쪽이  임선생의 고손자인 임백대표. [사진=권오주 기자]
3대에 결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대학독립의군부 총사령인 임병찬 선생의 후손들이 SBS드라마에 사실을 왜곡했다며 이의제기와 함께 심의를 요청했다. 사진 왼쪽이 임선생의 고손자인 임백대표. [사진=권오주 기자]

1885년 영국군함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사건이 생기자 거문도에 성을 쌓는 책임자인 설진별감으로 임무를 마치고 낙안군수를 지냈다. 이후 정읍시 종송리로 낙향해 후학과 의병을 양성에 힘썼다.

민비의 시해와 1905년 을사늑약후에  면암 최익현선생이 종송리를 찾아와 사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몰고가다 관군과 순창에서 정면승부를 벌일 쯤 면암은 비폭력을 선언, 의병을 해산했으나 대마도로 3년형을 받은 면암과 2년을 받은 임병찬 선생은 유폐된다.

면암 선생과 함께 단식 등으로 일본에 항거하면서도 면암을 석방시켜 준다면 자신이 5년형을 다 살겠다고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아 결국 면암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항일독립운동가 돈헌 임병찬 선생{사진= 임병찬 선생 고손 임백대표 제공]
항일독립운동가 돈헌 임병찬 선생 [사진= 임병찬 선생 고손 임백대표 제공]

출옥후 고종 밀칙으로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으로 전국의 항일 독립운동조직을 만들고 강령과 방침을 세워 거사 이틀전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가 드러나 무산됐다.

결국 임 선생은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원 모두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1916년 5월 거문도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25일 선생의 후손인 임백 대표(68.충남 천안시 용곡동. 사업가)등 고손자들이 < 세종경제신문>을 방문, “최근 종영된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각종 자료와 문헌 등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고조부인 임 선생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다”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후손들이 SBS측에 문제를 제기한 대목은 드라마 ‘녹두꽃’ 43회 가운데 36분에서 39분까지에 나오는 임 선생에 관한 부분이다.

드라마는 ‘임병찬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는 임병찬과 김개남' 이때 임병찬의 밀고에 의한 관군이 당도하는 소리가 들리자 임병찬이 물그릇을 실수로 뒤엎으며 “측간에 좀 다녀오겠다”며 황급히 뛰어 나가고 그런 임병찬의 뒷모습에 김개남이 “친구팔아 군수자리하나 얻었는가?, 잡것...”이라는 일침에 임병찬은  대꾸도없이 버선발로 마당으로 달려나가 관군에게 “개남, 김개남”이라고 소리침. 관군과 싸우고 관군의 칼에 의하여 죽게되는 김개남을 임병찬이 물끄러미 처다만 보고 있음’이라는 대목이다. 

3대에 걸친 독립항일운동가인 돈헌 임병찬 선생의 고손인 임백대표가 세종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 권오주 기자]
3대에 걸친 독립항일운동가인 돈헌 임병찬 선생의 고손인 임 백대표가 세종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 권오주 기자]

임 대표 등은 "이게 모두 사실이 아니라 드라마 흥미를 위해 실존 항일독립운동가를 비열하고 졸열한 인간으로 역사왜곡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임 대표등은 “구한말 당시 고조부께서는 전북 정읍시 종송리에서 의병을 양성하며 후학을 가르친 유학자였고, 당시 상황은 임금과 나라의 충성이 효심보다 중시되던 시대였다” 시대상을 소개한 뒤 “고조부께서는 그러나 동학을 일으킨 접주(지역책임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과 손을 잡지 않고, 근왕주의와 복벽주의를 고집했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은 난세를 타개할만한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과 같은 군주형이 아니라 전형적인 덕과 인을 중요시하는 세종대왕형의 조선군주였다.

 

SBS 금토 드러마 '녹두꽃'[사진=네이버켑처]
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사진=네이버켑처]

당시 이런 고종, 순종, 철종을 지키자는 복벽파와 임시정부 수뇌부가 들어와 대한제국을 통치하여야 한다는 공화파가 있었으나, 임병찬 선생과 훗날 안중근 의사 등은 임금과 조정을 지키려는 복벽파였다.

때문에 안중근 의사도 조정을 지키려는 함경도지역 동학 토벌대장이었으나, 이후 일제에 맞서 가열찬 항일독립운동을 한 기록도 있다.

임병찬 선생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선비에다 유학자이면서, 사비로 후학과 함께  일제의 수탈을 막기위해 의병을 창의하고 있었다.

임병찬 선생은 당연히 임금에 반기를 든 동학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 대표는 “유학을 하신 고조부께서는 임금과 조정에 충성을 다하여 지키겠다는 입장에서 동학이란 종교가 난을 일으켜 임금과 조정에 반기를 든데 대해 동의하지 않고 일체 개입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항일독립운동가 돈헌 임병찬 선생의 고손들이 SBS드라마 '녹두꽃'에 이의를 요구한 내용[ 사진= 임백대표 제공]
항일독립운동가 돈헌 임병찬 선생의 고손들이 SBS드라마 '녹두꽃'에 이의를 요구한 내용[ 사진= 임백대표 제공]

<세종경제신문>이 이와 관련한 역사를 살펴보니, 동학 접주인 손화중은 충청도 책임자이면서 온건 합리주의자로 타협파, 전북지역 접주인 전봉준은 중도파, 그리고 전남지역 접주인 김개남은 호전파로 매헌 황헌 선생은 평가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탐관오리의 폭정에 맞서 손화중, 전봉준, 김개남이 일으킨 동학은 호남지역을 휩쓸고 한성으로 가다가 청주성에서 관군에 패한 뒤 공주 우금치에서 전열을 정비했지만 대패했다.

이게  유명한 관군과 동학이 벌인 충남 공주 우금치 싸움이다.

 문제의 김개남은 간신히 살아남아  임병찬 선생이 거주하는 정읍의 종송리 이웃 너듸(四升)마을의 조용기라는 사람집에 피신하고 있었다.

임병찬 선생은 휘하에 김종섭이라는 사람을 보내 너듸마을보다 산세가 더 험한 종송리의 송두용의 집으로 김개남을 유인한뒤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관찰사 이도재에게 이를 고발한다.

항일독립운동가인 임병찬 선생이 면암최익현선생과 일으킨 항일 의병 창의군의 조직및 활동[도표=국가보훈처켑처]
항일독립운동가인 임병찬 선생이 면암 최익현선생과 일으킨 항일 의병 창의군의 조직 및 활동[도표=국가보훈처켑처]

김개남은 1894년 12월 1일 강화변방 황헌주에 의해 체포된다.  

임 대표는 “고조부 임병찬 선생께서는 임금과 조정에 반기를 든 것도 못마땅한데 관군과 타협하려는 손화영, 전봉준의 입장과 달리 무력, 폭력, 살상투쟁을 하려는 김개남을 그대로 둬선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관에 고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병찬 선생은 다음해(1895년)  정월에  조정에서 임실군수로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관찰사가 보낸 20석의 쌀도 돌려 보내어 임금과 조정에 충성심일 뿐 물욕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 대표등 임 선생의 후손들이 드라마 ‘녹두꽃’에 이의를 제기하는 부문은 김개남의 체포될 때 사실이다.

이 이화의 '인물한국사'등 문헌을 보니 ‘김개남이 체포될 당시 김개남은 측간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고, 관군이 당도하여 ’김개남 나오라‘하자, 김개남은 ’올줄 알았다. 볼일을 다보고 나가겠다‘고 했다고 적혀있다.

임 대표 등이 SBS드라마 ‘녹두꽃’이 고조부인 임병찬 선생의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한  부분은 여러 가지다.

임 대표는 “드라마에서 임병찬이 ‘측간에 다녀오겠다’며 허둥지둥 방을 나가고 버선발로 마당을 뛰어나가 황급히 관군에게 ‘개남!, 김개남!’이라고 소리쳤다는 부분부터 잘못됐다”라며 “여러 사료에 김개남은 고조부집에 머물지 않았고, 관군이 당도했을 때 고조부가 아니라 김개남이 측간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임 대표는 “때문에 ‘녹두꽃’드라마에서 고조부가 측간에 가겠다고 김개남을 속이고 허둥지둥대며 버선발로 마당을 나갔다는 내용은 사실도 아니고, 고조부가 비열하고 졸렬한 모습으로 왜곡 됐으니 반드시 바로 잡아줘야한다”고 주장했다.

면암 최익현 선생과 사제를 맺고 항일의병인 창의군의 거병을 한 항일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 사진= 세종경제신문db]
면암 최익현 선생과 사제를 맺고 항일의병인 창의군의 거병을 한 항일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 사진= 세종경제신문db]

임 대표는 “김개남이 임병찬에게 ‘친구팔아 군수자리 하나 얻었는가, 잡것’이라고 한 대목 역시 정읍의병사, 전라북도사등의 자료를 보면  임병찬은 관칙이 탐나서 고발하기 보다는 (임금과 조정을 지켜야한다) 신념에 의하여 김개남을 고발한 것”이라며 “이는 당시 기록에 군수자리나 포상을 일체 거부했다고 적혀있어, 이 부분도 역시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임 대표는  "또하나, 드라마에서 ’김개남이 임병찬의 집 마당에서 관군과 싸우고 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때 임병찬은 물끄러미 처다만 보았다‘는 대목도 사실과 크게 다르다“라며 “김개남은 임병찬의 집에서 죽은게 아니고 강화변방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어 전라감영에서 처형된 만큼 이는 사실이 전혀아니다”라고 억울해 했다.

그러면서 “근왕주의에 충실한 고조부(임병찬)가 임금과 조정에 반기를 들어 조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김개남을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당시의 상황과 두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면 예측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임 대표 등 고손자들은 “SBS '녹두꽃‘제작진과 정모 작가는 고조부가 임금과 나라를 위해서 이에 반기를 든 김개남을 고발할수 없는 상황인식,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고 드라마의 극적효과와 재미를 위해 독립운동가인 고조부의 삶을 비열하고 졸렬한 인물로 묘사해 욕되게 했다”고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전북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눈 임병찬 선생의 묘비석[사진= 두산백과 켑처]
전북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는 임병찬 선생의 묘비석[사진= 두산백과 켑처]

<세종경제신문>이 항일 독립운동가인 임병찬 선생의 후대를 취재해보니 임병찬 선생의 친동생 임병대 선생을 물론 아들 임응철 선생, 손자 임진, 임수명 선생모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

일제는 임병찬선생 순국후 선생 가족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는 바람에 만주로 피신하여 가계가 피폐해지고, 그 후손들은 어렵게 살고 있다.

해방후 나라에서는 임병찬, 임병철, 임응철, 임수명선생 등에게 건국훈장 등을 수여해 기리고 있으나, 후손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임 대표등은 SBS측에 “임병찬 의병장의 후손들은 드라마 '녹두꽃' 제작자들에 의해 그분의 사자명예훼손을 판단해 내용의 삭제나 보완,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를 심의해 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항일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의 후손들이 SBS 드라마 '녹두꽃' 제작진들에게 이의제기를하며 역사왜곡에 따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진= 임백대표측 제공]
항일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의 후손들이 SBS 드라마 '녹두꽃' 제작진들에게 이의제기를하며 역사왜곡에 따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진= 임백대표측 제공]

임 대표등은 “담당 SBS 제작 책임자를 만나거나 전화로 확인했더니 '할말이 없다. 일부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빠른 조치를 위해 저희 나름대로 판단해 알려주겠다'며 지난 10일까지 답을 준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방송이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많은 시청자와 커가는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야할 임병찬 선생이 왜곡되어 변절자나 졸열한 인물로 이미지가 남게되기 때문에 더 큰 문제"라며 속상해 하고 있다.

 한편 <세종경제신문>은 SBS 담당EP에게 전화로 확인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해외로밍이라는 답만 나올뿐 통화하지 못했다.  

 임 대표와의  [신수용의 명사대담]등은  별도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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