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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6)

비익조, 연리지의 전설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5/17 [17:44]

'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6)

비익조, 연리지의 전설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5/17 [17:44]
▲ 황혼의 양귀비꽃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와서도 자나깨나 죽은 양귀비를 잊을 수가 없었다. 돌아와보니 못도 뜰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피는 밤, 가을 비에 오동잎 소리 없이 떨어질 때면 그리움이 더욱 사무쳤다. 생사를 달리 한지 벌써 몇 년이 지났나? 그리운 귀비는 꿈속에서 마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현종은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는 도사 양통유(楊通幽)를 청해서 양귀비의 죽은 혼을 불러 달라고 했다.
도사는 정신을 집중하여 죽은 이의 혼백을 불러낸다고 하였다. 도사는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로 하여금 귀비의 혼백을 찾도록 하였다. 방사는 바람을 가르며 구름을 타고 번개처럼 달려가 하늘 끝 땅 속까지 남김없이 살폈다.
위로는 벽락(碧落), 아래로는 황천(黃泉)까지 뒤졌으나 귀비의 혼백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말이, 바다 가운데 선산(仙山)이 있는데, 누각은 옥처럼 빛나고 오색구름 피어오르는 곳으로 그곳에는 아름다운 선녀들이 모여사는 데 그 중 한 선녀의 이름이 옥진(玉眞)이라 하였다.
옥진은 바로 양귀비의 변신이라. 옥진을 찾아가 한나라 천자의 사자가 왔다며 문을 두드리니, 화려한 장막 안에서 잠들어 꿈을 꾸던 옥진의 혼이 놀라 깨었다.
구슬 발, 은 병풍이 차례로 열리고 구름같은 머리 반쯤 흐트러진 채 이제 막 깨어난 모습으로 머리 장식 매만지지도 않고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바람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옛날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를 추던 그녀를 보는 듯 했다. 옥같은 얼굴은 수심에 젖어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더니 군왕께 전할 감사의 말을 하였다.
“헤어진 뒤 옥음(玉音), 용안(龍顔) 듣고 뵙지 못하여 소양전(昭陽殿)에서 받던 은총과 사랑 모두 잃은 채 이곳 봉래궁(蓬萊宮)에서 긴 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머리 돌려 저 아래 세상 바라보아도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만 보일 뿐입니다.”
옥진은 이어, “간직하고 있던 물건으로 저의 깊은 정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여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져다가 천자께 보여 드리십시오” 하더니 금비녀와 자개상자를 둘로 나누어 그 한쪽씩을 사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의 마음이 이 물건들처럼 굳고 변하지 않는다면, 천상에서건 인간 세상에서건 꼭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장한가’는 이렇게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臨別殷勤重寄詞 詞中有誓兩心知
(임별은근중기사) (사중유서양심지)
七月七日長生殿 夜半無人私語時
(칠월칠일장생전) (야반무인사어시)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재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천장지구유시진) (차한면면무절기)

헤어질 무렵, 은근히 다시금 전할 말 부탁한다
그 말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네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사람없는 한밤중 은밀히 속삭였던 말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가 될지어다’
장구한 하늘 땅도 다할 때가 있을 것이나
이 한은 면면히 끊어질리 없으리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될지어다”
천보 10년(서기 751년) 칠월 칠석날, 화청궁 장생전에서 현종이 양귀비의 손을 잡고 맹세한 말이다.
‘비익조’ ‘연리지’ 모두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새와 나무이다. ‘비익조’는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새로 금실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나무로 애정이 깊은 부부를 의미한다.

평화와 번영의 대명사가 된 ‘개원의 치’를 만들어 냈던 현종도 만년에는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슬픔과 통한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양귀비가 죽고나서 6년후이다.
난이 평정된 후에도 당의 국력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당은 ‘안록산의 난’ 이후 ‘황소(黃巢)의 난’(881년)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907년에 20대 290년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양귀비로 인하여 당나라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한 표본이라고 하겠으나 기실 그 원인을 여인에게 돌리는 것은 반드시 사리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 보다는 여인의 미색(美色)에 취해 정사를 소홀히 한 군왕에게 책임을 물음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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