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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투시(透視)시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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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투시(透視)시대

송장길 / 언론인, 수필가 | 기사입력 2022/01/08 [16:48]

[수필] 투시(透視)시대

송장길 / 언론인, 수필가 | 입력 : 2022/01/08 [16:48]

현관을 나서면 열린 세상을 만나기 마련이다. 높이 선 아파트 건물들, 그 단지를 빠져나가 뻗은 크고 작은 도로들, 주변에 즐비한 상가들은 이제 뇌리에 깊이 자리잡은 생활 동반자들이다. ‘어김없이 또 오네’ 하는듯 언제나 은근히 맞아준다. 몇 년 전 이 곳으로 이사한 뒤 한참 동안은 건물과 길, 가게들, 행인들이 겉으로만 보이더니 지금은 내부의 구조나 장비, 사람들의 동선과 성분까지도 어렴풋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사물의 직관을 넘어 제법 투시가 되는 것이다.

송장길 /  언론인, 수필가
송장길 / 언론인, 수필가

산책은 아무래도 한적한 둘레길이나 오솔길, 산길이 제격이다. 이름 모를 풀이나 꽃, 바위, 교목이나 관목들과도 쉽게 교감하게 되며, 길과 흙. 돌들 위에 떨어져 짓밟히거나 아무렇게 뒹구는 낙엽들도 유심히 보게 된다. 낙엽들은 생명을 잃은 존재로서 서정적으로 애처롭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수분 결핍과 변색, 그리고 움을 틔우고 청록을 펼쳤던 계절, 줄기로부터의 분리, 거름이 됐다가 생물의 일부가 되는 순환 원리가 오버랩 되면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된다.

동네 뒷산 자락에 들어섰을 때 젊은 등산객 한 쌍이 도란거리며 하산하고 있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몸짓이 활기차고 율동적이었다. 외모도 세련돼 보였고 신체의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매스 미디어의 건강 프로그램 덕분에 체내의 기관들과 신진대사도 활발하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구나 그들의 밝은 표정에서 건실한 심성까지도 당겨졌다. “안녕하세요?” 가까워지자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십니까?” 반갑다는 반응이 재빨리 돌아왔다. “좋은 하루 되세요” 동반한 여성이 미소를 띄며 얼른 덧붙였다. 짧은 대화를 타고 그들의 맑은 의식 뭉치들이 전해질처럼 전해졌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의 살가움은 물론, 순수한 성격과 인간성까지 일면 느껴진 것이다. 배낭에 매달린 마스코트에서 인터넷과 IT 세계에 익은 뉴 노멀의 기운도 풍겼다. 그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쪽에서도 아마 순식간에 외관과 말투로 이쪽의 내면까지도 노크해봤을 것이다. 언뜻 스치는 단상, 언제부터 인지 대머리가 넓어지고 주름도 깊어진 데다가 차림새도 쌈박하지 않아 주류가 아닌 변두리 존재로 밀릴 때가 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느닷없이 새치기를 당하기도 하고, 친지들에게는 연륜과 내실은 고사하고 이용가치로만 대접받기도 한다. 세상의 물정이려니 하며 참으면 그만이지만, 사물의 파악력이 증폭된 오늘의 시류에 뒤진다는 소소한 연민을 느끼곤 한다.

그들의 뒷모습 너머로 인근 타운이 내려다보였다. 도시의 조감이 손바닥 위처럼 또렷했다. 정암 조광조의 묘소 주변과 심곡서원, 그리고 지역의 유래와 개발, 성장의 과정이 떠올랐다. 내력을 모르고 평면적으로 본다면 그 또한 수박 겉핥기이리라.

길에서 키가 작고 깡마른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연상됐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현재는 러시아 땅)에서 태어나 80평생 150km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으면서도 산책은 생애를 통틀어 두 번 밖에 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칸트는 157cm의 짥달막한 체구로 종종거리던 그 어김없는 산책길에서 근대철학의 금자탑인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세계 시민을 사유했을 법하다. 그 걸출한 칸트에게서도 박물관의 예스러움이 엿보인다.

고속으로 발전하는 과학과 세상을 하나로 묶는 커뮤니케이션은 인간과 사회를 근본과 골격, 살갗까지 바꾸고 있어서 옛 개념의 잣대는 빛을 잃고 있는가? IT와 인공지능, 메타버스, SNS의 쓰나미로 혁신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새 방식을 빠르게 찾아가고 있다. 범람하는 지식과 정보로 생활이 크게 바뀌고 있고, 새로운 의식으로 사물을 들여다본다. 19세기까지 풍미했던 고전적 낭만주의를 밀어낸 구르베의 사실주의, 그에 반항해 발레리가 불지피고 흄과 엘리엇, 헉슬리 등이 부채질한 모더니즘의 대변혁도, 이어진 신 모더니즘도 오늘의 토양에 깔렸으되 더 이상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회화 기법의 인상파와 입체파, 추상주의로도 현란한 오늘을 표현하기에는 붓질이 자라지 못하고, 도스토옙스키로 비롯된 문학의 심층 묘사도, 실존주의 송곳 작풍으로도 현대를 그리기에는 이미 힘이 달리는 듯하다.

스트라빈스키와 말러에 이르는 음악의 몸부림도 현대의 입구에서 멈칫거린다. 내시경과 초음파로 인간의 내장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이고, CT와 MRI로 뇌의 기능도 세세히 관측된다. 인간의 본질이야 아직도 인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인공지능의 체내 이식까지 연구되고 있어서 미래는 어디까지 튈지 모르겠다. 그 촉수의 끝에서 투시주의가 어른거린다.

몇 층이세요?” 우리집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한 젊은 여성이 인사를 한 뒤 자기 집 층의 버튼을 누르면서 나에게 물었다. “고맙습니다. 16층 좀 눌러주세요” “그렇죠? 알고 있었는데 긴가민가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전에 누르시는 걸 봤죠. 좀 특별하시니까” “어떻게 특별해요?” “뭔가 좀~. 잘 모르겠어요” 말을 아끼는 듯했지만 그녀는 이미 나 같은 이웃도 상당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익숙한 대학의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고 있어서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졸업 후 3년 차이며, 판교의 유수한 회사를 다닌다는 대화로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이 쪽에서도 무심코 상대를 뜯어보고 있었다. 관계나 관심보다 그만큼 시력이 향상되어서 이리라.

신인류는 새시대의 과학과 예술이 쏟아내는 지식과 정보, 새로운 경향을 교육과 개인 학습, 매스 컴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솜처럼 빨아들이고 체화한다. 그 풍부한 양식을 도구로 사물과 상대를 예리하고 깊이 관찰한다. 시력은 날로 향상될 것이며, 어떤 형태로든 투시주의라는 개념이 되어 시대를 아우르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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