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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탄생과 수난 (2)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9/01 [21:57]

가곡의 탄생과 수난 (2)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9/01 [21:57]

 가곡 <고향>의 실종. 곡 하나에 세 편의 노랫말

  <고향>은 노래로 널리 알려진 <향수>와 더불어 1932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대표적인 시다. 작곡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1933년 <고향>에 곡을 붙여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었다. 그런데 정지용이 월북작가로 규정되면서 가사를 쓸 수 없게되자 6.25 이후 <고향>의 멜로디에 두 개의 가사가 새로 붙게 되었다.

고향

      정지용 작시 채동선 작곡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고향을 그리며 지은 <향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향에 돌아와도 내 고향 같지가 않다’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정지용은 이 시를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인 1932년에 발표했는데,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때다.

▲ 시인 정지용

 

▲ 옥천의 정지용 생가

채동선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진 <고향>

  전남 벌교의 부자집 아들이었던 채동선은 서울 제1고보(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3.1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가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들어간다. 졸업하던 해인 1924년 바이올린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의 슈테른 쉔 음악학교에 들어가 바이올린과 작곡 등 서양전통 음악을 공부하고 5년 후 귀국한다. 그래서 그의 곡들에는 독일 색채의 선율과 화성이 특징이라는 분석이다.

채동선이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제1고보 시절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되어 난파에게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채동선은 정지용이 고향을 발표한 이듬해인 1933년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도쿄에 유학 중이던 여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에게 보냈다. 미국에서 줄리어드 음악대학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이해 도쿄에서 연 자신의 독창회에서 오빠가 보내온 이 곡을 처음 불러 조선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29년 귀국 후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은 모두 12곡이다. 이 가운데 <고향> <향수> <압천> <산엣 색시 들녘 사내> <다른 하늘> <또 하나의 다른 태양> <바다> <풍랑몽> 등 8곡이 정지용의 시다.

채동선은 6.25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2월 피난지 부산에서 병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피난 갈 때 서울 성북동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 등을 1963년에 찾아내면서 작곡가 채동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소란 여사는 악보를 찾아낸 후 <채동선 가곡집>을 출간하고자 했으나 당시 월북작가로 낙인 찍힌 정지용의 시로 된 가사는 쓸 수가 없었다.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 12곡 중 8곡이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므로 난감했다. 미망인은 채동선과 가깝게 지낸 이은상 시인에게 그 곡들에 붙일 새로운 가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고향>대신 <그리워>라는 가곡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고향>은 전쟁 전부터 워낙 유명한 가곡이어서 당시에 이미 박화목 시인이 1953년에 쓴 <망향>의 새 가사로 널리 불려지고 있었으나 유족들과 상의해 붙인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어쨌던 그러한 연유로 한 곡에 세 편의 노랫말이 생긴 것이다.

▲ 작곡가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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