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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로 생을 마감한 푸쉬킨: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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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로 생을 마감한 푸쉬킨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4)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1/09 [22:06]

결투로 생을 마감한 푸쉬킨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4)

이정식 | 입력 : 2014/01/09 [22:06]

 미인 아내가 비극의 시작

▲ 푸쉬킨과 나탈리야

푸쉬킨은32세 때인 1831년 13세 연하인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했다. 나탈리아는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표현했을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미모 덕에 사교계에서는 높은 인기를 누렸으나 남편인 푸쉬킨의 문학적 작업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푸쉬킨은 결혼을 할 때도 궁핍한 장모에게 빚을 내어 거액의 혼수금을 줘야했고, 결혼 후에는 사교계에서 각광받는 아내의 뒷바라지를 위해 계속 큰 돈을 들여야 했으므로 늘 돈에 쪼들렸다.

황제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 궁정행사에 늘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랬다. 그 덕에 푸쉬킨은 시종보라는 관직도 얻었다. 그런데 돈에 쪼들리던 그는 1835년 무렵에는 황제에게 3만 루블을 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소 늦은 결혼인데다가 그런저런 사정으로 푸쉬킨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게다가 어느날부터인가 나탈리아가 젊은 프랑스 장교 단테스와 밀회를 즐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테스는 푸쉬킨 처제(처형이란 말도 있다)의 남편, 즉 그와 동서지간이다. 어느날 그는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야유조의 익명 편지까지 받았다. 푸쉬킨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1937년 1월 27일 오후 결국 권총 결투가 벌어졌다. 군인과 시인의 결투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 결투에서 푸쉬킨은 치명상을 입고 이틀후인 1월 29일 오후 2시 45분 38년의 짦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주인공 오네긴의 친구 렌스키는 어느날 오네긴이 자기의 애인인 올가에게 접근하고 두 남녀가 히히덕거리자 화를 참지 못하고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결투에서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을 맞아 죽고 만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푸쉬킨의 삶도 자신이 쓴 소설처럼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군가 말했다. “푸쉬킨이 그의 시처럼 삶이 그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지는 않았을텐데”하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 말라 /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나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 그리고 지나간 것은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설움의 날들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반드시 오리니
 

▲ 이크쿠츠크 번화가

푸쉬킨이 죽은지 두 세기가 가까와 오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
러시아인치고 푸쉬킨의 시 한 두 편 암송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예브게니 오네긴> 등 그의 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줄줄이 꿰는 사람도 흔하다고 한다.
러시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전국에 20군데가 넘는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쉬킨이 신혼시절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있으며 푸쉬킨과 나탈리아의 동상도 서있다. 또 프레치스첸크 거리에는 그가 살아온 흔적들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된 웅장하고 현대적인 푸쉬킨 박물관이 있다.

한편, 결투에서 푸쉬킨을 죽인후 러시아인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던 단테스는 달아나듯 프랑스로 돌아갔고, 나탈리야는 푸쉬킨이 죽은 7년후 나이 많은 뾰뜨르 란스코이 장군과 재혼해 두 아이를 더 낳았다. 황제는 이들이 결혼한 직후 란스코이 장군을 근위대장으로 임명했고, 이들 부부가 낳은 첫 아이의 후견인이 돼주기도 했다 한다. 나탈리아는 51세 때인 1863년 세상을 떠났다.
미인 아내를 얻은 것이 비극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운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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