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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령 (4)-봄 노래 속의 진달래꽃[2]

이정식 | 기사입력 2015/04/18 [08:25]

봄의 전령 (4)-봄 노래 속의 진달래꽃[2]

이정식 | 입력 : 2015/04/18 [08:25]
▲ 진달래꽃 (부천 원미산)

김동진의 작곡으로 유명가곡이 된 <봄이 오면>에서 뿐만 아니라 파인 김동환의 다른 시 <산 너머 남촌에는>(가곡으로는 제목이 ‘남촌’)에도 진달래꽃이 이렇게 등장한다.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작시 김규환 작곡

1절: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이 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5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2절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그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들엔 호랑나비 떼

버들가지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산 너머 남촌에는> 역시 일제 때 지어진 시이다.

가곡 <바위고개> 속의 진달래꽃은 어떤가? 역시 일제 때인 1930년대에 지어진 이서향 작사 이흥렬 작곡의 <바위고개>에서 진달래꽃은 일제하에서 서글펐던 우리 민족의 정서를 이렇게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바위고개

이서향 작시 이흥렬 작곡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임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10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으며 그 언덕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보니 그 꽃을 즐겨 꺾어주던 우리 임이 생각나서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진다”는 것이 가사의 주요 내용이다.

한일합방 10여년후인 1920년 대에 지어진 이 가사에서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임’은 빼앗긴 조국이고, 진달래꽃은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며, 머슴살이는 식민지하에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의 서글픈 처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모든 악보집에 이흥렬 작사 작곡으로 되어있지만, 원래의 작사자는 작곡가 이흥렬의 고향 후배이자 제자인 이서향이라는 월북 작가임이 2001년 뒤늦게 밝혀진 바 있다.

 

‘아기 진달래’ 가 들어있는 <고향의 봄>

 그런가 하면 동요 <고향의 봄>에는 ‘아기 진달래’까지 등장한다. 시인 이원수의 동시 ‘고향의 봄’에 홍난파 선생이 1929년에 곡을 붙인 것이다.

 고향의 봄

이원수 작시 홍난파 작곡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진달래꽃이 이처럼 봄노래에 어느 꽃보다도 많이 등장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요즘에는 진달래꽃을 소재로 한 시나 노래를 짓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가 아는 진달래꽃이 들어가는 노래들은 대개 일본 식민지 때(1910-1945) 지어진 것들이 많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꽃’을 문학작품 등에 못 쓰게 함으로써 우리나라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꽃으로 대신했다는 얘기가 있다. 비극적인 민족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 정원에 핀 진달래꽃 (2015.4.18)

진달래꽃에 대한 이야기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진달래꽃

김소월 작시 김동진 작곡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젊은 소월이 부드럽고도 섬세한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지어낸 이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 25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의 작품이다. 정확히는 만 19세때 쓴 시다.

그리고 발표한지 3년 후인 1925년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의 제목으로 붙여졌다. 소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시는 여인의 노래이며 우리의 전통적인 이별의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데는 대체로 해석이 일치한다.

소월의 시들은 <진달래꽃>처럼 여인의 입장에서 쓴 듯한 것들이 많다. 소월 자체가 원래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폐인이 되어있는 가운데 집안의 여러 여성들 틈에서 자라면서 듣고 본 우리나라 여인들의 고통과 설움도 소월이 그러한 시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월이 우리 나이 3살 때인 2004년 일본인 철도 노동자들에게 맞아서 정신이상이 된 아버지는 그의 평생의 한이었다. 소월 역시 일본경찰의 간섭과 핍박 속에 자살로 1034년 32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일본 식민지하에서는 망국의 한을 달래주었던 진달래꽃.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꽃중 하나이기도 한  화사한 연분홍빛 진달래꽃이 이제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노래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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