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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의 모친이 가져온 부(富):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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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의 모친이 가져온 부(富)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16)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2/04 [00:12]

명문가 출신의 모친이 가져온 부(富)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16)

이정식 | 입력 : 2014/02/04 [00:12]

명문 발콘스키 가 출신의 어머니 마리야

▲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있었던 3년 후인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7-1837)와 마리야 니꼴라예브나 발콘스키(1791-1830) 사이에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인 발콘스키 가는 톨스토이 가보다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게다가 톨스토이 가는 아버지 니콜라이가 결혼할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도 어렵던 때였다. 그런데 니콜라이가 한 해 전 작고한 발콘스키 공작의 외동딸 마리야와 결혼을 하면서 집안에 엄청난 재산이 굴러들어오게 되었다. 마리야가 톨스토이 가로 시집을 오면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결혼을 기울어져 가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니콜라이의 정략결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마리야와의 결혼으로 야스나야 폴랴나(러시아 말로 ‘숲 속의 양지 바른 초지’란 뜻)의 저택과 1천 5백 헥타르의 땅을 비롯한 막대한 재산이 톨스토이 집안의 재산이 되었다.

마리야는 31살 때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결혼이었다. 신랑보다도 6살이 위였다. 원래 약혼자가 있었는데 결혼 전에 죽었다. 그 바람에 결혼이 늦어졌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는 가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인물이 좋았다.
니콜라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장교로 참전하여 성 블라디미르 훈장까지 받고 육군중령으로 제대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그가 군대를 떠난 6년 후의 일이다. 데카브리스트들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졸지에 고아가 된 5남매

부부는 결혼 후 1-2년 차이로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머니 마리야는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뜨리, 레프, 그리고 끝으로 마리야를 낳고는 1830년 마흔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딸을 출산하다가 얻은 산욕열이 원인이었다. 레프가 두 살 때였다. 레프는 9살 때인 1837년 아버지마저 잃었다. 아버지 니콜라이가 툴라에 일을 보러 갔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사망 원인에 의심스런 구석도 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5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톨스토이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친척집을 전전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형제들이 까잔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것도 까잔에 후견인이 된 작은 고모 베라게야 일리니찌나 유시꼬바 백작 부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까잔 대학에서 동양어학부의 아랍·터키어과를 다녔다. 그는 입학시험에서 아랍어, 터키어, 타타르어에 만점을 받았을 만큼 어학에 소질을 보였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대학 교육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졸업을 하지 않은 채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 후 23살 때인 1851년 휴가 나왔던 큰 형 니콜라이를 따라 카프카즈로 갔다가 그곳의 포병 여단에 자원입대해 장교가 되었다.
틈틈이 글을 써왔던 톨스토이는 1852년 카프카즈에서 그동안 써 온 <유년시대>를 마무리해 당시의 유명 시인 네그라소프가 편집인으로 있던 뻬쩨르부르그의 문학잡지 <현대인>에 보냈다.
네그라소프는 <유년시대> 원고를 읽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톨스토이에게 보냈다.

“옥고는 잘 읽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곧 잡지에 발표하겠습니다. 다른 글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는 충분한 자질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 작품은 당연히 속편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만 ‘움직임’이 좀 더 가미된다면 훨씬 훌륭한 소설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작품도 계속해서 나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당신이 우리 문단의 일시적인 손님이 아니라면, 익명으로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이름을 밝혀서 내 놓는 게 좋지 않을지,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톨스토이는 당시 그의 앞 이름의 이니셜 ‘L. N’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보냈다. 처녀작 <유년시대>는 이해 9월 <현대인>에 실렸으며 익명이긴 했지만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이 작가가 오래 산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

톨스토이는 1855년에는 한창 전쟁(크리미아 전쟁) 중이던 흑해 연안 크리미아 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되었다. 본인이 자청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은 1853년 10월 러시아와 터키사이의 분쟁으로 촉발되었는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이듬해 3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바스토폴은 크리미아 반도 남단의 항구도시로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지가 있는 곳이다.
세바스토폴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공방전은 1854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간이나 계속됐다.
톨스토이는 이 전쟁터에서 <12월의 세바스토폴>(1855년 4월), <5월의 세바스토폴>(1855년 7월),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1855년12월) 등 세편의 작품을 써서 <현대인>에 보냈다. 전쟁의 참상, 포위된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 병사들과 주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 등을 담은 것이었다.

세바스토폴에서 처음 써 보낸 <12월의 세바스토폴>은 <현대인> 1855년 6월호에 실렸는데,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가 먼저 읽고 감동하여 남편에게 읽도록 권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것과 이 작가를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은 이듬해인 1856년 1월호에 실렸는데, 톨스토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내건 최초의 작품이었다.

▲ 톨스토이의 자녀들

톨스토이는 1856년 11월 군에서 제대했다. 그리고 소설 <데카브리스트>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나폴레옹 전쟁 등을 깊이 탐구한 결과로 역사적인 대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뒤 40대 후반에 <안나 카레니나>로 창작의 꽃을 활짝 피웠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직후 다시 한번 <전쟁과 평화>의 속편이 될 <데카브리스트>의 집필을 시도한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뻬쩨르부르그에도 가고, 생존해 있던 당시의 데카브리스트들도 만났다. 톨스토이는 정부의 문서보관소에 있는 당시의 자료들을 필요로 했으나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를 쓰려던 톨스토이의 오랜 노력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중단되고 만다. (1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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